TELL
〔 시간의 자리 〕
조형예술
'미술'이라 통칭되는 '시각예술, 조형 예술'은 "시각을 통해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현, 감상,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미술;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명칭보다, 더욱 구체적 명명이 '시각예술, 조형 예술'이다.
조형 예술은 시각이라는 감각, 인지 수단을 통해 ‘표현, 감상, 평가’가 가능하다. 조형 예술의 구성소는 크게 '형태와 색'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형태를 표현하는 성분은 '점, 선, 면' 색은 '색과 빛'으로 구분 가능하다. 그런데, ‘인류가 개입된 창작 행위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점, 선, 면'이라는 형태가 '색과 빛'보다, 조금 더 의식적이며 인위적인 행위의 결과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쉽다.
이런 입장에서 조형예술의 구성소인 '형태의 점, 선, 면'을 먼저 보자.
선과 시간
시각적이며 공간적인 특징을 지닌 조형예술은 구상회화, 사진 등의 방법으로 창작될 때, 구체적 사물이나 인물, 정경, 풍경을 대상으로 표현하기에 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성'이다. 생동하는 시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건 중, 짧은 순간을 포착해 표현하고 묘사하는 시각예술의 특성 상 '시간의 누락, 결여'는 조형예술의 '조건이자 한계'.
'점, 선, 면'은 공간적 특성으로 기하학에서 차원을 구분 지을 때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로 분류한다. 그런데, '점, 선, 면' 중, 비교적 '시간성'을 함축한 성분은 무엇일까? '점, 선, 면'이라는 공간적 요소 중, 공간적 특성이 더 복잡해진 '면'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가장 덜 공간적인 '점'이 시간적 특성을 조금 더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추측할 수 있으나, 의외로 점과 면의 사이, 중간에 놓인 '선'이 시간적 특성을 더욱 가지고 있다. 이는 종이 위에 그려진 점, 선, 면 각각을 비교하면, 직관적으로 선이 다른 것들 보다 시간성을 함의함을 알 수 있다.
점은 위치상 고정되며, 면은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각 도형의 중심축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는 중심점을 내포하여 점과 유사하게 고정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 반면, 선은 ‘한끝과 다른 끝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연장된 방향성을 읽을 수 있으며, 방향성이 지닌 운동성으로 인해 운동이 가능한 조건인 시간, 시간성을 독해할 수 있다.
즉, 방향성을 지닌 선에서 시간성을 읽어낼 수 있기에, '점 선 면'중 ‘선’이 보다 더 시간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색과 시간
그렇다면, 조형 요소 중 '색'과 연관해 어떤 시간적 특성을 읽을 수 있을까?
가시광선 중, 가장 파장이 짧고, 진동 숫치가 높고, 에너지가 많은 '푸른색'이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고 한다. 가시광선의 푸른색은 파동과 연관해 자외선에 인접하는데, 자외선은 가시광선의 푸른색보다 더욱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으며, 이로 인해 에너지가 높아 태양광의 자외선은 살갗을 태우고, 인공 자외선은 살균효과를 지닌다.
푸른색이 에너지 량이 많고 속도가 빠르기에, 다른 색보다 더욱 시간적 특성을 많이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조형적이며 공간적 요소 중, 시간적 특성을 많이 띄는 것은 형태와 연관해서 '선', 색과 관련해서는 '푸른색'이다.
조형예술과 시간
조형예술인 회화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생생하며, 변화하는 운동의 표현을 반영한 작품에는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이라는 ‘자코모 발라’의 회화가 있다. 이는 주인과 함께 산책 중인 강아지의 모습을 강아지 위주로 클로즈업해서,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의 궤적을 5~6개로 중첩해 묘사해서, 동적인 표현을 극대화했다. 또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는 작품의 경우 스틸컷식 순간 포착이 아닌 연속적 동작을 한 화폭에 묘사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특성으로 구분하면, 넓은 붓질로 표현된 '면의 특성을 활용한 페인팅'이다.
미술의 조형 양식이나 방법 중에 '선'적 요소를 주로 활용한 '드로잉'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인 '스케치'와 닮았으나, 스케치가 계획한 작품을 그리기 위한 과정 차원의 밑그림이자 견본인 반면, '드로잉'은 그 자체가 완결된 작품이 된다.
모든 드로잉이 선만을 사용하지 않고, 붓과 물감을 활용해 옅은 색채로 표현되기도 하나, 일반 페인팅 비교, 두껍게 채색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긴다. 그래서 '질감, 양감'을 표현하기보다, 더욱 가볍게 형태 위주로 표현되는 '선 드로잉, 선화'에서 시간성을 읽어내는 것이 용이하다.
물리적 시공간
우리가 공인하는 ‘물리적이며 객관적 시간’이란, 공간적 특성을 반영하여 상보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드러내는 공식은 '속도 = 거리 / 시간'이다. 이는 '일정 시간동안 이동한 거리를 속도'로 나타낸다.
이처럼 ‘시간을 공간적 특성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그는 ‘태양과 달의 주기’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적 특성인 ‘태양의 운동에 따른 지상 그림자의 길이 변화. 달의 형태 변화’등 ‘공간적이며 운동하는 사물’의 현상에서 ‘시간의 주기성, 규칙성’을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했다. 이렇게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이 규정됐다.
이는 동시대에도 동일하게 공간과의 관계 속에 시간을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길이의 척도인 ‘미터’와 연관해 ’빛이 진공 중,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를 1미터’로 정한 것이 1983년이다.
이렇듯 공간적 성질과 시간적 특성은 상호 보완적이며 관계적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시간의 거울 속에 공간이 비추고, 공간의 거울 속에서 시간이 출현한다. 그렇다면, ‘조형예술, 시각예술’은 공간적 성격이므로 ‘조형예술의 거울 속에서 시간이 등장’할 개연성이 크며, 이러한 잠재성을 드러낸 것이 ‘선과 푸른색’의 시간성이다.
시간 공간 인간
한자 표기상 ‘時間 空間 人間’엔 공통적으로 ‘사이 간(間)’이 운율처럼 조합되어 있다. 이는 3가지 성질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관계적 존재라는 점을 반영한 작명 아닐까?
앞서 언급된 ‘속도는 일정 시간동안 이동한 거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보적이다. 더불어 이를 규정한 인간 또한 ‘人과 人’의 상호 관계 속에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한자어 중, ’공간, 시간, 인간‘과 관계된 단어에는 ’간격(間隔), 간혹(間或), 간접(間接)‘이 있다. '간격'은 사물, 공간, 시간상의 거리를 일컫는다. '간혹'은 어떤 상황이 불규칙적 시간차를 가지고 발생하는 경우를 꾸며주며, '간접'은 상황이나 사건 사이에 개입해 두 조건 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시간, 공간, 인간'의 개별적 용어들도 그렇지만, '간격, 간혹, 간접'은 '시 공 인(사물)'은 각각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해 말해준다. 그래서, ‘시 공 인’ 모두는 ‘관계적 존재’다.
즉, ‘시간이 없으면 공간을 말할 겨를이 없고, 공간이 없다면 시간이 머물 곳 없으며, 인간이 없으면 시공간을 말할 존재가 없고, 시공간 없이 인간은 생존 불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선
조형 요소 중 '형(태)'과 관련된 '점, 선, 면'. 이들 중 '선; 방향성; 속도; 시간성'의 연관성으로, 시간적 특성을 함의한 것은 '선'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앞서 밝혔다. '선의 시간성'은 '조형적이며 기하학적, 그리고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현실의 삶, 생활 속에서 선은 어떤 특성으로 다가올까?
선은 일상 속에 '구분'을 위해 자주 활용되어 쉽게 마주치는 구분선 중 '도로 경계선'이 있다. 이 경계선 주위를 '선의 시간성'과 관련해 차량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속도= 거리/시간'이라는 물리학적 '시공간'으로 구획된 경계선이 그어진 '도로'. 여기에서 마주하는 선은 빠른 이동이 가능한 철로의 궤도와 닮아있으나, 그 경계선을 부주의하게 넘나듦은 피차간의 생명, 숨이 멈춰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된다.
그래서 도로상의 경계선은 주행자와 보행자인 인류. 그들의 삶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는 조건임과 동시에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할 수 있는 한계이다. 이런 이유로 '도로 경계선’은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생존의 시계에 그어진 눈금’인 셈이다.
근현대 우리들 역사의 생명선
도로 위를 지나는 전선과 광케이블은 마치 동물의 혈관 속 헤모글로빈이 신체 곳곳에 산소를 운반하듯, 전기와 정보를 전달한다. 그로인해 거대 생명체인 사회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人間이 단수가 아닌 복수형이자, 개체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 명명이듯, 人과 人의 사이(間), 혈관의 선을 달리는 산소처럼 전기와 정보가 전달된다. 이처럼, 선은 시간성과 생명성 모두를 아우른다. 선형 흐름이 멈추는 순간, 선이 단절되는 순간, 시간도 생명도 위태롭게 된다.
거대 생명체를 관통하며 단절시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선'.
이러한 것에 '38선'이 있었고, 요절한 '38선'의 사생아 '휴전선'은 70세 노구임에도 똬리를 푼 참혹한 자태로 한반도의 허리를 절단시키고 있다.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동물들이 오가고, 인류들이 오르내리던 생명의 길. 이 위대한 길을 단지 몇 년의 아니 몇 시간 끝에 ‘정치, 이념적 섬'으로 탈바꿈되었다. 대륙의 시작이자 끝. 장구한 역사의 길. 이것이 우둔하고 우매하나 탐욕스런 인생들에 의해 단절되고 절단되어 '삼면은 짙푸른 바다, 북면은 핏빛 철책선으로 단절된 섬, 남한도(南韓島)'.
하지만, 대륙의 시작이자 종착지에선, 오늘도 기러기는 날고, 바람이 오가며, 강물은 흐르고, 달빛도 햇빛도 달리고, 역사의 큰 눈망울도 구른다.
디지털 신호의 점선
자동차가 질주하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그 사이에, 전선과 광케이블이 하늘과 대지의 매개자이듯 두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특히, 光케이블은 가장 빠른 ‘빛이라는, 입자이자 파동’을 활용해 정보를 나른다. 빛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신호는 엄밀하게 실선이 아닌 ‘점선’의 구조로 되어있다. 단절되고 불연속적이고 끊어져야 생명력을 지속하는 ‘선’. 이를 ‘디지털 신호’라 부른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적용된 서구 문명’의 선물인 디지털 신호의 기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동북아시아’의 ‘음양오행’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음양오행의 음괘와 양괘가 조합되어 8괘, 64괘로 조합되어 인간사를 말하는 ‘주역(의리 역학)’처럼. 디지털 신호는 이진법적 ‘점선’들에 의해 정보를 나른다.
이 덕분에 ‘과중한 여행 경비와 시간이 요구’되는 공간의 이동 없이, 또는 “열심히 일했으니 떠나라“는 자본(카드사)의 광고에 낚임 없이, 즉각적이며 저렴한 비용으로 원거리 대화(무선 통신)가 가능하다. 또한, 영상 매체나 SNS를 통해 ‘이미지’인 자신의 분신을 지구촌 곳곳으로 파견하거나, 호출 당하는 것조차 부담 없이 가능한 ‘Digi-tophia’.
시간의 자리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미술과 시지각 (루돌프 아른하임 저)’의 두터운 책 속에서 “고대 그리스에선 화가보다 의복 재단사를 ‘예술가’로 평가했고,,,,예술의 아름다움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규칙에 의해 일정 비율로 제작된 악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아주 낯설었던 견해. 이러한 내용이 얼핏 ‘의미 없는 음향’일 수도 있었으나, 이젠 지극히 익숙하게 각인되었다.
차갑고 건조하기조차 한 수학적 이진법에 기초한 ‘디지털 신호’가 時間과 空間의 ‘사이(間)’를 가로질러 人과 人 사이를 연결하며 人間에 대해 질문을 한다. 아니 어쩌면 ‘응답’한다. 다만, 어두워 우리들이 미처 알아듣지 못하기에 ‘신호’ 대신 ‘(의미 없는) 음향’이라 여겼던 것일까?
모니터를 응시한 눈이 깜빡거리는 이 ‘순간이자 찰나’. 책 속에 형광펜의 점선으로 그은 경구와 검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조각배에서 보내는 모르스 부호로 퍼지는 신호. 그리고 광케이블 속을 30만 킬로의 속도로 ‘패스워드’가 질주한다.
아, 우리의 호흡(呼吸)인 ‘비움(뱉음/呼)과 채움(들이쉼/吸)’의 반복조차 ‘디지털 신호’의 이진법적 점선을 닮았다. 모르스 신호를 보내는 듯 딸깍거리는 마우스.
보라. ‘시공간, 시간의 자리이자 공간의 시간 내부’는 ‘왼발과 오른발, 왼쪽 날개와 오른 날개’의 엇갈림을 통해 ‘디지털의 이진법적 점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른다. 그렇게 ‘깜빡거리고, 딸깍거리고, 절뚝거리고, 퍼득거리며’ 우리는 ‘걸어 나아가고, 넘고, 지나 간다’.
미술가 + 농부, 황동하
〔 시간의 자리 〕
조형예술
'미술'이라 통칭되는 '시각예술, 조형 예술'은 "시각을 통해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현, 감상,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미술;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명칭보다, 더욱 구체적 명명이 '시각예술, 조형 예술'이다.
조형 예술은 시각이라는 감각, 인지 수단을 통해 ‘표현, 감상, 평가’가 가능하다. 조형 예술의 구성소는 크게 '형태와 색'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형태를 표현하는 성분은 '점, 선, 면' 색은 '색과 빛'으로 구분 가능하다. 그런데, ‘인류가 개입된 창작 행위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점, 선, 면'이라는 형태가 '색과 빛'보다, 조금 더 의식적이며 인위적인 행위의 결과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쉽다.
이런 입장에서 조형예술의 구성소인 '형태의 점, 선, 면'을 먼저 보자.
선과 시간
시각적이며 공간적인 특징을 지닌 조형예술은 구상회화, 사진 등의 방법으로 창작될 때, 구체적 사물이나 인물, 정경, 풍경을 대상으로 표현하기에 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성'이다. 생동하는 시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건 중, 짧은 순간을 포착해 표현하고 묘사하는 시각예술의 특성 상 '시간의 누락, 결여'는 조형예술의 '조건이자 한계'.
'점, 선, 면'은 공간적 특성으로 기하학에서 차원을 구분 지을 때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로 분류한다. 그런데, '점, 선, 면' 중, 비교적 '시간성'을 함축한 성분은 무엇일까? '점, 선, 면'이라는 공간적 요소 중, 공간적 특성이 더 복잡해진 '면'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가장 덜 공간적인 '점'이 시간적 특성을 조금 더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추측할 수 있으나, 의외로 점과 면의 사이, 중간에 놓인 '선'이 시간적 특성을 더욱 가지고 있다. 이는 종이 위에 그려진 점, 선, 면 각각을 비교하면, 직관적으로 선이 다른 것들 보다 시간성을 함의함을 알 수 있다.
점은 위치상 고정되며, 면은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각 도형의 중심축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는 중심점을 내포하여 점과 유사하게 고정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 반면, 선은 ‘한끝과 다른 끝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연장된 방향성을 읽을 수 있으며, 방향성이 지닌 운동성으로 인해 운동이 가능한 조건인 시간, 시간성을 독해할 수 있다.
즉, 방향성을 지닌 선에서 시간성을 읽어낼 수 있기에, '점 선 면'중 ‘선’이 보다 더 시간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색과 시간
그렇다면, 조형 요소 중 '색'과 연관해 어떤 시간적 특성을 읽을 수 있을까?
가시광선 중, 가장 파장이 짧고, 진동 숫치가 높고, 에너지가 많은 '푸른색'이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고 한다. 가시광선의 푸른색은 파동과 연관해 자외선에 인접하는데, 자외선은 가시광선의 푸른색보다 더욱 파장이 짧고, 진동수가 높으며, 이로 인해 에너지가 높아 태양광의 자외선은 살갗을 태우고, 인공 자외선은 살균효과를 지닌다.
푸른색이 에너지 량이 많고 속도가 빠르기에, 다른 색보다 더욱 시간적 특성을 많이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조형적이며 공간적 요소 중, 시간적 특성을 많이 띄는 것은 형태와 연관해서 '선', 색과 관련해서는 '푸른색'이다.
조형예술과 시간
조형예술인 회화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생생하며, 변화하는 운동의 표현을 반영한 작품에는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이라는 ‘자코모 발라’의 회화가 있다. 이는 주인과 함께 산책 중인 강아지의 모습을 강아지 위주로 클로즈업해서,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의 궤적을 5~6개로 중첩해 묘사해서, 동적인 표현을 극대화했다. 또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는 작품의 경우 스틸컷식 순간 포착이 아닌 연속적 동작을 한 화폭에 묘사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특성으로 구분하면, 넓은 붓질로 표현된 '면의 특성을 활용한 페인팅'이다.
미술의 조형 양식이나 방법 중에 '선'적 요소를 주로 활용한 '드로잉'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인 '스케치'와 닮았으나, 스케치가 계획한 작품을 그리기 위한 과정 차원의 밑그림이자 견본인 반면, '드로잉'은 그 자체가 완결된 작품이 된다.
모든 드로잉이 선만을 사용하지 않고, 붓과 물감을 활용해 옅은 색채로 표현되기도 하나, 일반 페인팅 비교, 두껍게 채색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긴다. 그래서 '질감, 양감'을 표현하기보다, 더욱 가볍게 형태 위주로 표현되는 '선 드로잉, 선화'에서 시간성을 읽어내는 것이 용이하다.
물리적 시공간
우리가 공인하는 ‘물리적이며 객관적 시간’이란, 공간적 특성을 반영하여 상보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드러내는 공식은 '속도 = 거리 / 시간'이다. 이는 '일정 시간동안 이동한 거리를 속도'로 나타낸다.
이처럼 ‘시간을 공간적 특성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그는 ‘태양과 달의 주기’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적 특성인 ‘태양의 운동에 따른 지상 그림자의 길이 변화. 달의 형태 변화’등 ‘공간적이며 운동하는 사물’의 현상에서 ‘시간의 주기성, 규칙성’을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했다. 이렇게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이 규정됐다.
이는 동시대에도 동일하게 공간과의 관계 속에 시간을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길이의 척도인 ‘미터’와 연관해 ’빛이 진공 중,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를 1미터’로 정한 것이 1983년이다.
이렇듯 공간적 성질과 시간적 특성은 상호 보완적이며 관계적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시간의 거울 속에 공간이 비추고, 공간의 거울 속에서 시간이 출현한다. 그렇다면, ‘조형예술, 시각예술’은 공간적 성격이므로 ‘조형예술의 거울 속에서 시간이 등장’할 개연성이 크며, 이러한 잠재성을 드러낸 것이 ‘선과 푸른색’의 시간성이다.
시간 공간 인간
한자 표기상 ‘時間 空間 人間’엔 공통적으로 ‘사이 간(間)’이 운율처럼 조합되어 있다. 이는 3가지 성질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관계적 존재라는 점을 반영한 작명 아닐까?
앞서 언급된 ‘속도는 일정 시간동안 이동한 거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보적이다. 더불어 이를 규정한 인간 또한 ‘人과 人’의 상호 관계 속에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한자어 중, ’공간, 시간, 인간‘과 관계된 단어에는 ’간격(間隔), 간혹(間或), 간접(間接)‘이 있다. '간격'은 사물, 공간, 시간상의 거리를 일컫는다. '간혹'은 어떤 상황이 불규칙적 시간차를 가지고 발생하는 경우를 꾸며주며, '간접'은 상황이나 사건 사이에 개입해 두 조건 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시간, 공간, 인간'의 개별적 용어들도 그렇지만, '간격, 간혹, 간접'은 '시 공 인(사물)'은 각각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해 말해준다. 그래서, ‘시 공 인’ 모두는 ‘관계적 존재’다.
즉, ‘시간이 없으면 공간을 말할 겨를이 없고, 공간이 없다면 시간이 머물 곳 없으며, 인간이 없으면 시공간을 말할 존재가 없고, 시공간 없이 인간은 생존 불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선
조형 요소 중 '형(태)'과 관련된 '점, 선, 면'. 이들 중 '선; 방향성; 속도; 시간성'의 연관성으로, 시간적 특성을 함의한 것은 '선'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앞서 밝혔다. '선의 시간성'은 '조형적이며 기하학적, 그리고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현실의 삶, 생활 속에서 선은 어떤 특성으로 다가올까?
선은 일상 속에 '구분'을 위해 자주 활용되어 쉽게 마주치는 구분선 중 '도로 경계선'이 있다. 이 경계선 주위를 '선의 시간성'과 관련해 차량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속도= 거리/시간'이라는 물리학적 '시공간'으로 구획된 경계선이 그어진 '도로'. 여기에서 마주하는 선은 빠른 이동이 가능한 철로의 궤도와 닮아있으나, 그 경계선을 부주의하게 넘나듦은 피차간의 생명, 숨이 멈춰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된다.
그래서 도로상의 경계선은 주행자와 보행자인 인류. 그들의 삶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는 조건임과 동시에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할 수 있는 한계이다. 이런 이유로 '도로 경계선’은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생존의 시계에 그어진 눈금’인 셈이다.
근현대 우리들 역사의 생명선
도로 위를 지나는 전선과 광케이블은 마치 동물의 혈관 속 헤모글로빈이 신체 곳곳에 산소를 운반하듯, 전기와 정보를 전달한다. 그로인해 거대 생명체인 사회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人間이 단수가 아닌 복수형이자, 개체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 명명이듯, 人과 人의 사이(間), 혈관의 선을 달리는 산소처럼 전기와 정보가 전달된다. 이처럼, 선은 시간성과 생명성 모두를 아우른다. 선형 흐름이 멈추는 순간, 선이 단절되는 순간, 시간도 생명도 위태롭게 된다.
거대 생명체를 관통하며 단절시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선'.
이러한 것에 '38선'이 있었고, 요절한 '38선'의 사생아 '휴전선'은 70세 노구임에도 똬리를 푼 참혹한 자태로 한반도의 허리를 절단시키고 있다.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동물들이 오가고, 인류들이 오르내리던 생명의 길. 이 위대한 길을 단지 몇 년의 아니 몇 시간 끝에 ‘정치, 이념적 섬'으로 탈바꿈되었다. 대륙의 시작이자 끝. 장구한 역사의 길. 이것이 우둔하고 우매하나 탐욕스런 인생들에 의해 단절되고 절단되어 '삼면은 짙푸른 바다, 북면은 핏빛 철책선으로 단절된 섬, 남한도(南韓島)'.
하지만, 대륙의 시작이자 종착지에선, 오늘도 기러기는 날고, 바람이 오가며, 강물은 흐르고, 달빛도 햇빛도 달리고, 역사의 큰 눈망울도 구른다.
디지털 신호의 점선
자동차가 질주하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그 사이에, 전선과 광케이블이 하늘과 대지의 매개자이듯 두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특히, 光케이블은 가장 빠른 ‘빛이라는, 입자이자 파동’을 활용해 정보를 나른다. 빛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신호는 엄밀하게 실선이 아닌 ‘점선’의 구조로 되어있다. 단절되고 불연속적이고 끊어져야 생명력을 지속하는 ‘선’. 이를 ‘디지털 신호’라 부른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적용된 서구 문명’의 선물인 디지털 신호의 기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동북아시아’의 ‘음양오행’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음양오행의 음괘와 양괘가 조합되어 8괘, 64괘로 조합되어 인간사를 말하는 ‘주역(의리 역학)’처럼. 디지털 신호는 이진법적 ‘점선’들에 의해 정보를 나른다.
이 덕분에 ‘과중한 여행 경비와 시간이 요구’되는 공간의 이동 없이, 또는 “열심히 일했으니 떠나라“는 자본(카드사)의 광고에 낚임 없이, 즉각적이며 저렴한 비용으로 원거리 대화(무선 통신)가 가능하다. 또한, 영상 매체나 SNS를 통해 ‘이미지’인 자신의 분신을 지구촌 곳곳으로 파견하거나, 호출 당하는 것조차 부담 없이 가능한 ‘Digi-tophia’.
시간의 자리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미술과 시지각 (루돌프 아른하임 저)’의 두터운 책 속에서 “고대 그리스에선 화가보다 의복 재단사를 ‘예술가’로 평가했고,,,,예술의 아름다움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규칙에 의해 일정 비율로 제작된 악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아주 낯설었던 견해. 이러한 내용이 얼핏 ‘의미 없는 음향’일 수도 있었으나, 이젠 지극히 익숙하게 각인되었다.
차갑고 건조하기조차 한 수학적 이진법에 기초한 ‘디지털 신호’가 時間과 空間의 ‘사이(間)’를 가로질러 人과 人 사이를 연결하며 人間에 대해 질문을 한다. 아니 어쩌면 ‘응답’한다. 다만, 어두워 우리들이 미처 알아듣지 못하기에 ‘신호’ 대신 ‘(의미 없는) 음향’이라 여겼던 것일까?
모니터를 응시한 눈이 깜빡거리는 이 ‘순간이자 찰나’. 책 속에 형광펜의 점선으로 그은 경구와 검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조각배에서 보내는 모르스 부호로 퍼지는 신호. 그리고 광케이블 속을 30만 킬로의 속도로 ‘패스워드’가 질주한다.
아, 우리의 호흡(呼吸)인 ‘비움(뱉음/呼)과 채움(들이쉼/吸)’의 반복조차 ‘디지털 신호’의 이진법적 점선을 닮았다. 모르스 신호를 보내는 듯 딸깍거리는 마우스.
보라. ‘시공간, 시간의 자리이자 공간의 시간 내부’는 ‘왼발과 오른발, 왼쪽 날개와 오른 날개’의 엇갈림을 통해 ‘디지털의 이진법적 점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른다. 그렇게 ‘깜빡거리고, 딸깍거리고, 절뚝거리고, 퍼득거리며’ 우리는 ‘걸어 나아가고, 넘고, 지나 간다’.
미술가 + 농부, 황동하
작가 | 김형관, 송채림, 한영권, 허남준, 황동하 |
전시장 | 아티스트런스페이스 쇼앤텔 (Artist run space Showandtell, アーティスト・ラン・スペース・ショーアンドテル) |
주소 | 0720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로 18길 8 지하1층 |
오시는 길 |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 4번출구에서 도보 5분 지하철 9호선 당산역 13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기간 | 2023.07.19(수) - 26(수) |
관람시간 | 13:00-18:00 |
휴일 |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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