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6년 1월 21일 ~ 3월 7일
위치
화이트 큐브 서울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6
‘(그 여행은 끝났고 또 다른 여행이 이제 막 동텄다)’ 1
— 에텔 아드난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의 2인전 '태양을 만나다'는 타향에서 각자의 예술적 언어를 형성한 두 작가의 작업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레바논 출신의 에텔 아드난(1925–2021)과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 이성자(1918–2009)는 서로 다른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이주와 망명을 경험했으나, 이들의 예술적 여정은 여러 면에서 궤를 같이한다. 두 작가 모두 정규 미술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된 후 회화를 시작했으며,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독자적인 시각 어법을 구축했다는 점은 이들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전시 제목 ‘태양을 만나다’는 에텔 아드난이 1968년 발표한 시에서 차용한 것으로,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의 죽음을 기리는 애가(elegy)이다. 이는 오랜 시간 우주론적 탐구를 회화로 확장해 온 이성자의 작업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두 작가는 철학적 사유와 추상(abstraction), 그리고 1960년대 우주 탐사 열기가 투영된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공유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유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요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점 또한 유사하다. 에텔 아드난은 태양과 달, 타말파이스 산의 실루엣을, 이성자는 지구와 행성계의 구조를 환기하는 기하학적 형상을 화면에 자주 등장시킨다. 이처럼 추상의 어법을 빌려 기억과 풍경, 나아가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한 이들의 시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한 예술적 영감으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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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 모두 30대 이후 작업을 시작했으나, 각자가 처한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성자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프랑스로 이주하며 깊은 단절을 겪었다. 전남편과 남게 된 세 아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는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소외와 전후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추상 미술계에 적응해야 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1953년에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며 서구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몇 개의 시기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파리 생활 초기, 이성자는 앙리 괴츠(Henri Goetz) 문하에서 추상 미술의 어휘를 배워 나갔다. 우주와 무의식에 관심을 두는 초현실주의에 경도되었던 스승 괴츠의 가르침은 예술가 이성자의 형성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 구상 시대 작품의 단단한 붓놀림이 해체되고, 작가의 의도대로 흩어진 작은 붓자국들이 이룬 성좌와 다양한 색의 면이 중첩된 표면과 제스처가 구상적 모티프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1950년대 후반의 작업에서 작가는 고향에 대한 기억과 모성의 속성을 기하학적 형태와 화면의 질감에 담아냈다. 이후 1961~1968년의 ‘여성과 대지’ 시리즈는 작가가 여성과 대지의 관계를 추상화하는 데 몰두했던 시기다. 평론가들은 세밀한 붓자국으로 가득 채운 화면을 농부가 경작한 밭이나 전통 화문석에 비유하며, 그의 조형 어법과 역사적으로 여성이 담당한 노동의 재료와 과정이 맺는 관계성에 주목했다.
이성자와 달리 에텔 아드난이 파리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까지는 굴곡진 과정이 있었다. 처음 프랑스로 이주했을 당시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이었던 에텔 아드난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색과 제스처를 본격적으로 실험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캘리포니아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그의 화풍은 미국 서부의 빛 그리고 물감을 섞지 않고 재빨리 얹는 작업방식의 순간성이 결합된 산물이다. 1970년대 초 베이루트로 돌아온 작가는 예술 및 문학계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이는 곧 그의 전시와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내전 발발로 그는 다시금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 두 번째 이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모든 살아있는 상징이 폭력에 의해 상실된 상태‘였기에 ‘절대적(absolute)’인 망명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2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파리에 정착해서야 비로소 이 파괴적 단절의 경험은 기억, 풍경, 형이상학적 사유를 매개하는 정제된 추상 언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
작가는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를 작업대에 수평으로 펼친 후 순수 안료를 그대로 얹어 색의 면들을 만들었다. 내밀한 교감을 기대케 하는 크기의 화면에는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선명한 색의 면과 띠가 맞물리며 이루는 풍경이 안온한 빛에 잠긴 듯,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환기한다. 1960년대 들어 태피스트리로 눈을 돌린 작가는 이 색채 어휘를 느리게 손끝이 감각하는 매체로 확장시켰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시절부터 손으로 짜는 기법을 실험한 그는 아틀리에 팽통(Atelier Pinton)의 장인들과 협업하면서 그간 회화에 등장해온 절제된 형태들을 더 복잡하고 때로는 더 불안정한 지형 안에서 전개한다.
한편, 이성자는 1969년의 뉴욕 여행을 계기로 앞선 ‘여성과 대지’ 시리즈에서 발아한 공간적 직관을 더욱 명징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업은 땅 위에 펼친 안정된 구도 안에 공간의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요히 떠오르는 선, 사각형, 원 등 원초적인 형태는 인체와 지형의 지표로 기능하는 동시에, 지구의 경계를 초월한 우주적 공간 질서 안에서 연결돼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균형과 긴장의 상태에 놓인 이 형태들은 서로 충돌하는 힘과 문화적 유산 사이에서 평형을 찾으려는 노력의 시발점이었고, 이성자의 작업과 예술적 탐구는 이로부터 더 광활한 지평선을 향해 확장되어 갔다.
1960년대의 달 탐사 그리고 그로 인해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대두는 두 작가에게 생산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당대의 우주론적 상상력은 에텔 아드난의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회화와 태피스트리에서 천체의 형태가 점점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형과 공중에 떠 있는 사각형이 해와 달을 환기했고, 강렬한 색면에 의해 화면의 이차원성이 부각되었으며, 지평선은 간결한 색의 띠로 환원되었다. 타말파이스 산을 그리는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이 시기 이후 등장한 풍경은 새로운 관점에서 구성되었다. 특히 태피스트리에서는 지평선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비정형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지리적 경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 버린다. 이 무렵, 이성자는 1995~2008년에 전개된 ‘우주 시대’ 연작을 가능하게 한 개념적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이로써 그의 예술적 탐구는 대지에서 도시, 하늘을 거쳐 마침내 천문학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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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tel Adnan, A Funeral March for the First Cosmonaut (최초 우주비행사를 위한 장례 행렬), 1968, accordion book, with pen and ink and watercolour on paper,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2 Etel Adnan, ‘Voyage, War and Exile (여행, 전쟁 그리고 망명)’, Al-‘Arabiyya, vol.28, 1995, p.8
2026년 1월 21일 ~ 3월 7일
위치
화이트 큐브 서울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6
‘(그 여행은 끝났고 또 다른 여행이 이제 막 동텄다)’ 1
— 에텔 아드난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의 2인전 '태양을 만나다'는 타향에서 각자의 예술적 언어를 형성한 두 작가의 작업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레바논 출신의 에텔 아드난(1925–2021)과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 이성자(1918–2009)는 서로 다른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이주와 망명을 경험했으나, 이들의 예술적 여정은 여러 면에서 궤를 같이한다. 두 작가 모두 정규 미술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된 후 회화를 시작했으며,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독자적인 시각 어법을 구축했다는 점은 이들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전시 제목 ‘태양을 만나다’는 에텔 아드난이 1968년 발표한 시에서 차용한 것으로,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의 죽음을 기리는 애가(elegy)이다. 이는 오랜 시간 우주론적 탐구를 회화로 확장해 온 이성자의 작업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두 작가는 철학적 사유와 추상(abstraction), 그리고 1960년대 우주 탐사 열기가 투영된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공유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유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요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점 또한 유사하다. 에텔 아드난은 태양과 달, 타말파이스 산의 실루엣을, 이성자는 지구와 행성계의 구조를 환기하는 기하학적 형상을 화면에 자주 등장시킨다. 이처럼 추상의 어법을 빌려 기억과 풍경, 나아가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한 이들의 시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한 예술적 영감으로 공명한다.
적게 읽기
두 작가 모두 30대 이후 작업을 시작했으나, 각자가 처한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성자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프랑스로 이주하며 깊은 단절을 겪었다. 전남편과 남게 된 세 아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는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소외와 전후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추상 미술계에 적응해야 하는 예술가로서의 과제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1953년에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며 서구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몇 개의 시기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파리 생활 초기, 이성자는 앙리 괴츠(Henri Goetz) 문하에서 추상 미술의 어휘를 배워 나갔다. 우주와 무의식에 관심을 두는 초현실주의에 경도되었던 스승 괴츠의 가르침은 예술가 이성자의 형성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 구상 시대 작품의 단단한 붓놀림이 해체되고, 작가의 의도대로 흩어진 작은 붓자국들이 이룬 성좌와 다양한 색의 면이 중첩된 표면과 제스처가 구상적 모티프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1950년대 후반의 작업에서 작가는 고향에 대한 기억과 모성의 속성을 기하학적 형태와 화면의 질감에 담아냈다. 이후 1961~1968년의 ‘여성과 대지’ 시리즈는 작가가 여성과 대지의 관계를 추상화하는 데 몰두했던 시기다. 평론가들은 세밀한 붓자국으로 가득 채운 화면을 농부가 경작한 밭이나 전통 화문석에 비유하며, 그의 조형 어법과 역사적으로 여성이 담당한 노동의 재료와 과정이 맺는 관계성에 주목했다.
이성자와 달리 에텔 아드난이 파리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까지는 굴곡진 과정이 있었다. 처음 프랑스로 이주했을 당시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이었던 에텔 아드난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색과 제스처를 본격적으로 실험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캘리포니아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그의 화풍은 미국 서부의 빛 그리고 물감을 섞지 않고 재빨리 얹는 작업방식의 순간성이 결합된 산물이다. 1970년대 초 베이루트로 돌아온 작가는 예술 및 문학계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이는 곧 그의 전시와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내전 발발로 그는 다시금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 두 번째 이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모든 살아있는 상징이 폭력에 의해 상실된 상태‘였기에 ‘절대적(absolute)’인 망명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2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파리에 정착해서야 비로소 이 파괴적 단절의 경험은 기억, 풍경, 형이상학적 사유를 매개하는 정제된 추상 언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
작가는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를 작업대에 수평으로 펼친 후 순수 안료를 그대로 얹어 색의 면들을 만들었다. 내밀한 교감을 기대케 하는 크기의 화면에는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선명한 색의 면과 띠가 맞물리며 이루는 풍경이 안온한 빛에 잠긴 듯,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환기한다. 1960년대 들어 태피스트리로 눈을 돌린 작가는 이 색채 어휘를 느리게 손끝이 감각하는 매체로 확장시켰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시절부터 손으로 짜는 기법을 실험한 그는 아틀리에 팽통(Atelier Pinton)의 장인들과 협업하면서 그간 회화에 등장해온 절제된 형태들을 더 복잡하고 때로는 더 불안정한 지형 안에서 전개한다.
한편, 이성자는 1969년의 뉴욕 여행을 계기로 앞선 ‘여성과 대지’ 시리즈에서 발아한 공간적 직관을 더욱 명징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업은 땅 위에 펼친 안정된 구도 안에 공간의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요히 떠오르는 선, 사각형, 원 등 원초적인 형태는 인체와 지형의 지표로 기능하는 동시에, 지구의 경계를 초월한 우주적 공간 질서 안에서 연결돼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균형과 긴장의 상태에 놓인 이 형태들은 서로 충돌하는 힘과 문화적 유산 사이에서 평형을 찾으려는 노력의 시발점이었고, 이성자의 작업과 예술적 탐구는 이로부터 더 광활한 지평선을 향해 확장되어 갔다.
1960년대의 달 탐사 그리고 그로 인해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대두는 두 작가에게 생산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당대의 우주론적 상상력은 에텔 아드난의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회화와 태피스트리에서 천체의 형태가 점점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형과 공중에 떠 있는 사각형이 해와 달을 환기했고, 강렬한 색면에 의해 화면의 이차원성이 부각되었으며, 지평선은 간결한 색의 띠로 환원되었다. 타말파이스 산을 그리는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이 시기 이후 등장한 풍경은 새로운 관점에서 구성되었다. 특히 태피스트리에서는 지평선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비정형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지리적 경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 버린다. 이 무렵, 이성자는 1995~2008년에 전개된 ‘우주 시대’ 연작을 가능하게 한 개념적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이로써 그의 예술적 탐구는 대지에서 도시, 하늘을 거쳐 마침내 천문학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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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tel Adnan, A Funeral March for the First Cosmonaut (최초 우주비행사를 위한 장례 행렬), 1968, accordion book, with pen and ink and watercolour on paper,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2 Etel Adnan, ‘Voyage, War and Exile (여행, 전쟁 그리고 망명)’, Al-‘Arabiyya, vol.28, 1995, p.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