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속도, "오베르데르딩겐"
구나연(미술평론가)
극의 서사와 연출에서 드라마트루기(Dramaturgy)는 직관이나 우연을 배제한 채, 명료한 논리 가운데 극의 방향을 이끈다. 양문모는 과거 독일 유학시절 무대미술을 공부할 때 "무대를 이루는 모든 것들에는 근거가 있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주제의 극을 실연하기 위해 모든 불확실성의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무대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지나온 모든 시간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한계와 모든 일이 인과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사실 위에서 우연성에 관하여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대라는 허구의 리얼리티에서 회화라는 이미지의 모호로 이동한 그의 여정은 논리에서 우연으로, 확고에서 변모로의 경향성을 띤다. 이는 아마도, 세계는 무대일 수 없음에도 늘 무대를 보듯 세계를 보고자 하는 시각성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으로 회화라는 영토를 선택하고, 또한 이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는 어떤 본질을 탐구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낯선 독일 지명이자 이번 전시의 제목인 <오베르데르딩겐>은 양문모가 직접 겪은 개인적 체험에서 기인한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딸아이의 사진을 찍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연하게 포착된 그 단어는 눈 앞의 사실만을 전부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는 시지각의 한계와 관련된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현으로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오랜 속박에 대해, 그는 외부를 향한 시선을 통해 모이고, 뒤섞이고, 희미해지는 기억과 인상의 가변성을 더듬어가는 방식으로 조금씩 해방의 실마리를 찾아 나아간다. 이는 시속 250Km로 달리는 기차 안 창문으로 휘발되는 풍경처럼, 파악할 틈 없이 지나가는 미지의 한가운데에서 보유되는 현존의 문제를 회화적 행위로 붙잡아 보려는 시도이다. 복잡한 세계의 역동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인식을 회화적 응집으로 풀어낼 때, "오베르데르딩겐"과 같이 무엇인가 지극히 명료해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문모는 '보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백지화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확보된 보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의 사이에서 회화적 요소들의 간섭과 교차가 켜켜이 쌓여간다. 얼마나 많은 감각적 전이와 곡절을 통해 이르게 된 화면인지 선뜻 짐작 할 수 없지만, 어딘가는 투명하게 이전의 이미지 위를 흐르고, 어딘가는 불투명한 이미지들이 서로의 위를 횡단하며 그의 회화는 우리의 앞으로 전진한다. 또렷한 망막의 논리를 전제로 꽉 조여진 시각에서 점차 풀어지며 아득한 무한으로 이어진 그 회화적 행위는 그리기의 과정에 돌출되는 예측불가한 운동과 이로 인한 감정적 변이의 형태들로 화면 위에 고스란히 축적된다.
예컨대 <3개의 물체와 3개의 소리를 확인한 다음 신체 부위 3개를 움직여보세요>의 경우, 캔버스는 과감하게 분할된 색면의 단층으로 구축되고, 색채의 표면 아래에는 수많은 형상과 추상의 요인들이 깃들어 있다. '회화적 행위를 통해 시각적 경험에서 멀어짐'이라는 역설을 품은 이것은 재현에서 이탈할수록 가까워지는 회화적 현현이자, 제어할 수 없는 우연을 무한한 회화적 현상으로 포용한 결과이다. 얼핏 환영으로 다가오는 좌측 아래의 형상, 중력에 의해 흘러내린 물감의 하강, 그와 같이 이어지는 색선들의 하강과 거친 횡단, 거대한 색면의 간섭 가운데서 숙명처럼 무수히 일어나는 색채의 엇갈림 등은 닿고자 하는 확고한 상태를 지향하기 보다, 어떤 회화적 태도의 동적 상태를 꿰뚫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양문모에게 본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촉발된 회화적 행위는 이미지와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을 잉태하며, 그 감정을 재차 봄으로써 회화적 행위가 이어진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이 지닌 시간은 결국 시속 250Km의 하염없는 세계와 등가의 힘으로 맞물리는 회화의 속도, "오베르데르딩겐"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구나연(미술평론가)
극의 서사와 연출에서 드라마트루기(Dramaturgy)는 직관이나 우연을 배제한 채, 명료한 논리 가운데 극의 방향을 이끈다. 양문모는 과거 독일 유학시절 무대미술을 공부할 때 "무대를 이루는 모든 것들에는 근거가 있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주제의 극을 실연하기 위해 모든 불확실성의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무대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지나온 모든 시간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한계와 모든 일이 인과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사실 위에서 우연성에 관하여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대라는 허구의 리얼리티에서 회화라는 이미지의 모호로 이동한 그의 여정은 논리에서 우연으로, 확고에서 변모로의 경향성을 띤다. 이는 아마도, 세계는 무대일 수 없음에도 늘 무대를 보듯 세계를 보고자 하는 시각성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으로 회화라는 영토를 선택하고, 또한 이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는 어떤 본질을 탐구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낯선 독일 지명이자 이번 전시의 제목인 <오베르데르딩겐>은 양문모가 직접 겪은 개인적 체험에서 기인한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딸아이의 사진을 찍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연하게 포착된 그 단어는 눈 앞의 사실만을 전부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는 시지각의 한계와 관련된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현으로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오랜 속박에 대해, 그는 외부를 향한 시선을 통해 모이고, 뒤섞이고, 희미해지는 기억과 인상의 가변성을 더듬어가는 방식으로 조금씩 해방의 실마리를 찾아 나아간다. 이는 시속 250Km로 달리는 기차 안 창문으로 휘발되는 풍경처럼, 파악할 틈 없이 지나가는 미지의 한가운데에서 보유되는 현존의 문제를 회화적 행위로 붙잡아 보려는 시도이다. 복잡한 세계의 역동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인식을 회화적 응집으로 풀어낼 때, "오베르데르딩겐"과 같이 무엇인가 지극히 명료해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문모는 '보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백지화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확보된 보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의 사이에서 회화적 요소들의 간섭과 교차가 켜켜이 쌓여간다. 얼마나 많은 감각적 전이와 곡절을 통해 이르게 된 화면인지 선뜻 짐작 할 수 없지만, 어딘가는 투명하게 이전의 이미지 위를 흐르고, 어딘가는 불투명한 이미지들이 서로의 위를 횡단하며 그의 회화는 우리의 앞으로 전진한다. 또렷한 망막의 논리를 전제로 꽉 조여진 시각에서 점차 풀어지며 아득한 무한으로 이어진 그 회화적 행위는 그리기의 과정에 돌출되는 예측불가한 운동과 이로 인한 감정적 변이의 형태들로 화면 위에 고스란히 축적된다.
예컨대 <3개의 물체와 3개의 소리를 확인한 다음 신체 부위 3개를 움직여보세요>의 경우, 캔버스는 과감하게 분할된 색면의 단층으로 구축되고, 색채의 표면 아래에는 수많은 형상과 추상의 요인들이 깃들어 있다. '회화적 행위를 통해 시각적 경험에서 멀어짐'이라는 역설을 품은 이것은 재현에서 이탈할수록 가까워지는 회화적 현현이자, 제어할 수 없는 우연을 무한한 회화적 현상으로 포용한 결과이다. 얼핏 환영으로 다가오는 좌측 아래의 형상, 중력에 의해 흘러내린 물감의 하강, 그와 같이 이어지는 색선들의 하강과 거친 횡단, 거대한 색면의 간섭 가운데서 숙명처럼 무수히 일어나는 색채의 엇갈림 등은 닿고자 하는 확고한 상태를 지향하기 보다, 어떤 회화적 태도의 동적 상태를 꿰뚫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양문모에게 본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촉발된 회화적 행위는 이미지와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을 잉태하며, 그 감정을 재차 봄으로써 회화적 행위가 이어진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이 지닌 시간은 결국 시속 250Km의 하염없는 세계와 등가의 힘으로 맞물리는 회화의 속도, "오베르데르딩겐"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작가 | 양문모 |
전시장 | 드로잉룸 (drawingRoom, ドローイングルーム) |
주소 | 03036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68-4, 2층 |
오시는 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9분 (통인시장 끝에서 왼쪽으로 도보 1분, 영화루 맞은편 골목) |
기간 | 2024.05.16(목) - 06.08(토) |
관람시간 | 11:00 - 18:00 |
휴일 | 일요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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