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혹은 시작의 끝>
하이트컬렉션은 2022년 젊은작가전으로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가 참여하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를 개최한다. 전시가 세 작가를 소환한 키워드는 ‘힘’이다. 이들이 전시 안에서 만들어내는 질주의 방향과 속력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힘, 삶을 견인하는 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키우는 힘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누군가에게는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그저 운용 중인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기도 한 문제, 예술 그리고 힘. 이번 전시는 이 거대한 단어를 렌즈 삼아 각기 다른 작업을 전개하는 세 작가의 작업을 살핀다.
힘, 권력, 그리고 욕망. 이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모를 불편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과연 ‘욕망’이 그러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은 여기서 차치 하더라도,) 본 전시는 스스로를 소비/소진 시킬 수밖에 없는 저성장 고경쟁 초자본 기술진보 사회 안에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예술적 성취해 향해 나아가는가를 살피는 것에 집중한다. 이번 전시에서 원정백화점은 사적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발현했다가 소멸하는 불온전한 판타지적 이미지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여 끈적한 상태, 소모적 움직임으로 전이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모습을 결합/소실한 아바타의 모습으로 자아를 갱신해 나아가고, 박론디는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의 과거 안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욕망의 원형이 되어준 사건들을 톺아냄으로써 초자본주의 시대의 일방향적 욕망 속에 묻혀버린 개인의 힘을 끄집어내길 시도한다. 한편 추수는 전통적 방식의 예술 너머 가상 공간으로의 이주를 이미 시작해 자아를 운용하고 상업과 비상업,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발생하는 기술적 이격과 에너지의 순환을 받아들이며 전환적 감각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에게 공적 개념과 사적 개념, 과거와 현재, 미래, 물질세계과 가상세계의 구분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보고 또 지향하는, 그리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이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전시 제목에서 얻을 수 있겠다. “끝에서 두 번째 세계”는 그 무엇도 정의 내려지지 않은 중간지대이다. 혹은 기존의 관념, 어법으로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물론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일찍이 크라카우어 말했지만, 다시 한번 그의 표현에 기대어보자면 “역사의 대기실”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곳, 미래와 과거, 판타지와 리얼리티, 노스탤지어가 뒤섞여 선형적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시공이 뒤틀린 상태가 바로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고 할 때, 이는 다시 한번 동시대 미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전시는 ‘동시대성’이라는 익숙하지만 실체 없는, 어떤 면에선 지리멸렬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단어에 도킹을 시도한다.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의 대기실에 모여 곧 역사가 될(지 모를) 것들을 길어 올려보는 이 전시는 동시대 미술 안에서 ‘역사’가 언제까지 유효한 개념일까 하는 질문을 남긴다. 하나로 수렴하지도, 흐름에 안착하지도, 관념에 부합하지도 않는 상태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자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글 신지현
<끝에서 두 번째 세계 >
1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힘은 우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예술의 힘』 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예술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는 근본적으로 예술의 역사이고 예술의 역사는 그것을 지배하고자 시도하는 어떤 행위자나 제도적 기관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고 하였다.[1]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모든 것들에 예술의 힘이 작용하는 시대라고 하면서 예술을 신 또는 절대자와 동등한 위치로 보고자 한다. 가브리엘의 주장에 동의하자면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이미 절대반지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작금(2022년으로 한정하더라도)의 현실은 그가 주장하는 것과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예술의 힘은 막연하고 난해하기만 할 뿐, 사람들의 욕망은 좀더 직접적이고 좀더 세속적인 곳을 향하고 있다. 예술은 이들이 욕망하는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충분하며 그들에게 절대적인 힘은 교묘하지만 좀더 실질적이고,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작동하는 (새로운?) 힘이다. 그리고 나는 그 힘이 (다름이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2022년 한해를 마감하는 지금, 감히 강조하자면 지구상에는 ‘영향력’이라고 불러야 하는 하나의 힘이 더 생겼고(평범해 보이던 용어가 새삼스럽게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이 힘은 만유인력처럼 우주의 온 존재를 감싸고 발휘되는 중이다. 좀더 정확히는 ‘인플루언서’(2022년의 흔한 용어!)들의 ‘영향력’이라 해야겠지만, 이 힘은 권력의 다른 모습이고, 자본의 다른 모습이고, 철학과 예술의 다른 모습이다. 아예 권력, 자본, 철학, 예술, 이 모두를 일거에 흡수해 버리는 힘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가진 신성한 힘도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 권력, 자본, 철학, 예술은 영향력의 의미장 내에 존재하게 된 것들이고, 계급, 부, 사상, 취향은 이 힘이 선사하는 트로피다. 바야흐로 모두가 인플루언서를 꿈꾸고, 모두가 트로피를 원하는 시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무엇을 꿈꾸어야 할까? 여전히 예술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예술의 의미장 속으로 들어가 있어야 할까? 아니면 앤디 워홀이 진작에 깨달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꿈은 예술가가 아니라 인플루언서여야 할까? 과연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무엇일까?
2
언젠가는 시간의 끝이 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순간은 끝 직전의 세계, 즉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고 칭해도 될 것이다. 대체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차적이고 선형적인 개념을 기조로 하여, 도래할 미래의 변화를 얼마나 근미래로 볼 것인가, 또는 먼 미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당도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주관적인 차이만 있는 것 같다. 즉 미래에 대한 속도 감각이나 시기상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연쇄적이고 미래를 향해 일방향으로 흐른다는 생각은 견고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일방향으로 가는 시간의 벡터에서 수많은 개별적인 사건들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인과 관계를 형성하거나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하고 기존의 맥락과 무관하게 연결되기도 하는 것을 실상 우리는 경험하고 인지하고 있다. 또 역사를 연대기적 시간순으로만 바라보고 통사로 기술할 때 수많은 의미 있는 사건들과 순간들이 누락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유고집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역사가 하나의 특정한 문명의 맥락에서 연대순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당연시 하는 역사관의 타당성을 비판한 바 있다.[2] 그는 역사의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다양한 덩어리진 시간들(shaped times)이 있어서 획일적인 시간의 흐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말한다. 덩어리진 시간들이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배열체, 사건들이 저마다 나름의 고유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시간의 척도는 공통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크라카우어의 관점으로 역사의 시간을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는 소비자본주의가 절정에 다다르고 가상세계, 메타 유니버스, 디지털 자아 등 실재계를 초월하는 다양한 세계관이 등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각의 사건은 균질한 시간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자들(여기서는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의 역사 역시 덩어리진 시간들이 중요할 것이고 이들은 각자 사건의 유의미한 패턴들을 형성하며 동시에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통과하는 시간을 동시대의 단일한 시대상황으로 통칭하는 것을 지양하는 대신, 이들이 점유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발현 가능한 여러가지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서 타진해보는 것이 미시사를 중시한 크라카우어의 역사관에 부응하는 방법일 것 같다.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끝을 향해간다고 할 때 그 끝을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현재의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에, 현재의 다양한 상황들이 훨씬 더 복잡한 경로를 통해 세계의 끝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면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 있는 현재의 시간은 좀더 흥미로워지리라.
3
세 명의 개별자들, 즉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는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과거를 포용하면서 또 각자 비슷한 듯 상이한 관점에서 미래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론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desire)으로 파생되는 감정을 예리하게 다루며, 삶에서 강렬한 욕망의 순간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의 서사는 플릭플락시계, 구디핀 등 구체적인 상품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적 차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대중적 공감을 향한다. 또 상품이나 사물의 수공예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스스로를 시각 제작자(visual crafter)라고 명명한다. <이모가 분 바르고 짧은 단발에 입술을 까맣게 칠하고 선물이라고 시계를 건네주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 그것처럼 맘에 쏙 드는 물건은 처음이었어>(2021)는 그가 마주한 첫번째 신화적인 성격의 경험이다. <임선화를 찾아서>(2022)에서 다루는 선화는 박론디에게 신화적인 요소를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 행위를 가르쳐준 첫번째 손님이다. 박론디가 자신의 미적 세계관의 형성과 시각적 욕망의 기원을 추적하는 노력은 프루스트의 기억술을 연상시킨다. 그의 미적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던 친구 선화는 정작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원정백화점은 전작 프로젝트를 위해 일회적인 이름으로 지었지만 이후 활동명으로 쭈욱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본명에서 일부를 탈락시키고 새로운 일부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현재 원정백화점은 미디어 설치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환상성을 가진 이미지에 대한 욕망과 그 이미지가 타인의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탐구하는데, 릴스형의 셀피 비디오와 퍼포먼스로 구성된 <ઈ스킨케어신화ઉ>(2022)는 디지털 자아를 구축하는 기획 패키지로서 온라인과 온라인 밖에서 업데이트 하는 현재진행형 신화로 설정되었다. 이 작업에서 스크린의 매끈한 피부를 부각시켰다면, <탈락한 피부와 디지털 체액 편지>(2022)는 그 매끈한 피부 내부에서 떨어지는 혈흔을 상상한 것이다. <BED TRAINING>(2022)은 그 피부와 혈흔으로 구성된 몸과 같은 장소를 상상하며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에게 온라인 상의 디지털 자아와 온라인 밖의 자아는 혼합이 되기도 하고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며 타인의 세계와 관계하는데, 동시에 물리적 신체의 한계, 욕망, 접촉에 대한 감각을 끊임 없이 환기시킨다. 추수는 디지털 환경에서 인간의 존재 조건과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며, 현실의 신체적 굴레를 벗어난 캐릭터를 만들어 가상 세계에서의 활동을 구축해 나가며 궁극적으로는 탈신체화된 세계에서도 영원할 예술을 상상한다. 스스로를 ‘디지털 네이티브’로 규정하는 그는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제안으로 버추얼 작곡가 에이미를 탄생시켰고 가상 세계에서의 에이미의 자아와 삶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현실과 연결된 에이미의 활동을 지켜보는 중이다. 한편, 추수가 AI와 협업한 <자기야, 베타월드는 곧 끝나>(2022) 연작은 데이터로 치환된 세계가 좌우할 정보 권력을 예상하게 하면서도 아직 인간에 의한 스테레오 타입이 AI가 발휘하는 능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다.
글 이성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김남시 역, 『예술의 힘』(서울: ㅇㅣㅂㅣ, 2022), 16.
[2]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역,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파주: 문학동네, 2012), 157.
기획: 이성휘 신지현
그래픽 디자인: 불도저
주최 하이트문화재단
후원 하이트진로(주)
하이트컬렉션은 2022년 젊은작가전으로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가 참여하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를 개최한다. 전시가 세 작가를 소환한 키워드는 ‘힘’이다. 이들이 전시 안에서 만들어내는 질주의 방향과 속력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힘, 삶을 견인하는 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키우는 힘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누군가에게는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그저 운용 중인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기도 한 문제, 예술 그리고 힘. 이번 전시는 이 거대한 단어를 렌즈 삼아 각기 다른 작업을 전개하는 세 작가의 작업을 살핀다.
힘, 권력, 그리고 욕망. 이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모를 불편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과연 ‘욕망’이 그러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은 여기서 차치 하더라도,) 본 전시는 스스로를 소비/소진 시킬 수밖에 없는 저성장 고경쟁 초자본 기술진보 사회 안에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예술적 성취해 향해 나아가는가를 살피는 것에 집중한다. 이번 전시에서 원정백화점은 사적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발현했다가 소멸하는 불온전한 판타지적 이미지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여 끈적한 상태, 소모적 움직임으로 전이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모습을 결합/소실한 아바타의 모습으로 자아를 갱신해 나아가고, 박론디는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의 과거 안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욕망의 원형이 되어준 사건들을 톺아냄으로써 초자본주의 시대의 일방향적 욕망 속에 묻혀버린 개인의 힘을 끄집어내길 시도한다. 한편 추수는 전통적 방식의 예술 너머 가상 공간으로의 이주를 이미 시작해 자아를 운용하고 상업과 비상업,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발생하는 기술적 이격과 에너지의 순환을 받아들이며 전환적 감각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에게 공적 개념과 사적 개념, 과거와 현재, 미래, 물질세계과 가상세계의 구분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보고 또 지향하는, 그리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이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전시 제목에서 얻을 수 있겠다. “끝에서 두 번째 세계”는 그 무엇도 정의 내려지지 않은 중간지대이다. 혹은 기존의 관념, 어법으로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물론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일찍이 크라카우어 말했지만, 다시 한번 그의 표현에 기대어보자면 “역사의 대기실”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곳, 미래와 과거, 판타지와 리얼리티, 노스탤지어가 뒤섞여 선형적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시공이 뒤틀린 상태가 바로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고 할 때, 이는 다시 한번 동시대 미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전시는 ‘동시대성’이라는 익숙하지만 실체 없는, 어떤 면에선 지리멸렬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단어에 도킹을 시도한다.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의 대기실에 모여 곧 역사가 될(지 모를) 것들을 길어 올려보는 이 전시는 동시대 미술 안에서 ‘역사’가 언제까지 유효한 개념일까 하는 질문을 남긴다. 하나로 수렴하지도, 흐름에 안착하지도, 관념에 부합하지도 않는 상태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자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글 신지현
<끝에서 두 번째 세계 >
1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힘은 우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예술의 힘』 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예술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는 근본적으로 예술의 역사이고 예술의 역사는 그것을 지배하고자 시도하는 어떤 행위자나 제도적 기관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고 하였다.[1]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모든 것들에 예술의 힘이 작용하는 시대라고 하면서 예술을 신 또는 절대자와 동등한 위치로 보고자 한다. 가브리엘의 주장에 동의하자면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이미 절대반지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작금(2022년으로 한정하더라도)의 현실은 그가 주장하는 것과 사뭇 다르게 보이는데,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예술의 힘은 막연하고 난해하기만 할 뿐, 사람들의 욕망은 좀더 직접적이고 좀더 세속적인 곳을 향하고 있다. 예술은 이들이 욕망하는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충분하며 그들에게 절대적인 힘은 교묘하지만 좀더 실질적이고,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작동하는 (새로운?) 힘이다. 그리고 나는 그 힘이 (다름이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2022년 한해를 마감하는 지금, 감히 강조하자면 지구상에는 ‘영향력’이라고 불러야 하는 하나의 힘이 더 생겼고(평범해 보이던 용어가 새삼스럽게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이 힘은 만유인력처럼 우주의 온 존재를 감싸고 발휘되는 중이다. 좀더 정확히는 ‘인플루언서’(2022년의 흔한 용어!)들의 ‘영향력’이라 해야겠지만, 이 힘은 권력의 다른 모습이고, 자본의 다른 모습이고, 철학과 예술의 다른 모습이다. 아예 권력, 자본, 철학, 예술, 이 모두를 일거에 흡수해 버리는 힘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가진 신성한 힘도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 권력, 자본, 철학, 예술은 영향력의 의미장 내에 존재하게 된 것들이고, 계급, 부, 사상, 취향은 이 힘이 선사하는 트로피다. 바야흐로 모두가 인플루언서를 꿈꾸고, 모두가 트로피를 원하는 시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무엇을 꿈꾸어야 할까? 여전히 예술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예술의 의미장 속으로 들어가 있어야 할까? 아니면 앤디 워홀이 진작에 깨달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꿈은 예술가가 아니라 인플루언서여야 할까? 과연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무엇일까?
2
언젠가는 시간의 끝이 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순간은 끝 직전의 세계, 즉 끝에서 두 번째 세계라고 칭해도 될 것이다. 대체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차적이고 선형적인 개념을 기조로 하여, 도래할 미래의 변화를 얼마나 근미래로 볼 것인가, 또는 먼 미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당도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주관적인 차이만 있는 것 같다. 즉 미래에 대한 속도 감각이나 시기상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연쇄적이고 미래를 향해 일방향으로 흐른다는 생각은 견고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일방향으로 가는 시간의 벡터에서 수많은 개별적인 사건들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인과 관계를 형성하거나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하고 기존의 맥락과 무관하게 연결되기도 하는 것을 실상 우리는 경험하고 인지하고 있다. 또 역사를 연대기적 시간순으로만 바라보고 통사로 기술할 때 수많은 의미 있는 사건들과 순간들이 누락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유고집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역사가 하나의 특정한 문명의 맥락에서 연대순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당연시 하는 역사관의 타당성을 비판한 바 있다.[2] 그는 역사의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다양한 덩어리진 시간들(shaped times)이 있어서 획일적인 시간의 흐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말한다. 덩어리진 시간들이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배열체, 사건들이 저마다 나름의 고유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시간의 척도는 공통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크라카우어의 관점으로 역사의 시간을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는 소비자본주의가 절정에 다다르고 가상세계, 메타 유니버스, 디지털 자아 등 실재계를 초월하는 다양한 세계관이 등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각의 사건은 균질한 시간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자들(여기서는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의 역사 역시 덩어리진 시간들이 중요할 것이고 이들은 각자 사건의 유의미한 패턴들을 형성하며 동시에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통과하는 시간을 동시대의 단일한 시대상황으로 통칭하는 것을 지양하는 대신, 이들이 점유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발현 가능한 여러가지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서 타진해보는 것이 미시사를 중시한 크라카우어의 역사관에 부응하는 방법일 것 같다.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끝을 향해간다고 할 때 그 끝을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현재의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에, 현재의 다양한 상황들이 훨씬 더 복잡한 경로를 통해 세계의 끝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면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 있는 현재의 시간은 좀더 흥미로워지리라.
3
세 명의 개별자들, 즉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는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과거를 포용하면서 또 각자 비슷한 듯 상이한 관점에서 미래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론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desire)으로 파생되는 감정을 예리하게 다루며, 삶에서 강렬한 욕망의 순간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의 서사는 플릭플락시계, 구디핀 등 구체적인 상품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적 차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대중적 공감을 향한다. 또 상품이나 사물의 수공예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스스로를 시각 제작자(visual crafter)라고 명명한다. <이모가 분 바르고 짧은 단발에 입술을 까맣게 칠하고 선물이라고 시계를 건네주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 그것처럼 맘에 쏙 드는 물건은 처음이었어>(2021)는 그가 마주한 첫번째 신화적인 성격의 경험이다. <임선화를 찾아서>(2022)에서 다루는 선화는 박론디에게 신화적인 요소를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 행위를 가르쳐준 첫번째 손님이다. 박론디가 자신의 미적 세계관의 형성과 시각적 욕망의 기원을 추적하는 노력은 프루스트의 기억술을 연상시킨다. 그의 미적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던 친구 선화는 정작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원정백화점은 전작 프로젝트를 위해 일회적인 이름으로 지었지만 이후 활동명으로 쭈욱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본명에서 일부를 탈락시키고 새로운 일부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현재 원정백화점은 미디어 설치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환상성을 가진 이미지에 대한 욕망과 그 이미지가 타인의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탐구하는데, 릴스형의 셀피 비디오와 퍼포먼스로 구성된 <ઈ스킨케어신화ઉ>(2022)는 디지털 자아를 구축하는 기획 패키지로서 온라인과 온라인 밖에서 업데이트 하는 현재진행형 신화로 설정되었다. 이 작업에서 스크린의 매끈한 피부를 부각시켰다면, <탈락한 피부와 디지털 체액 편지>(2022)는 그 매끈한 피부 내부에서 떨어지는 혈흔을 상상한 것이다. <BED TRAINING>(2022)은 그 피부와 혈흔으로 구성된 몸과 같은 장소를 상상하며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에게 온라인 상의 디지털 자아와 온라인 밖의 자아는 혼합이 되기도 하고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며 타인의 세계와 관계하는데, 동시에 물리적 신체의 한계, 욕망, 접촉에 대한 감각을 끊임 없이 환기시킨다. 추수는 디지털 환경에서 인간의 존재 조건과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며, 현실의 신체적 굴레를 벗어난 캐릭터를 만들어 가상 세계에서의 활동을 구축해 나가며 궁극적으로는 탈신체화된 세계에서도 영원할 예술을 상상한다. 스스로를 ‘디지털 네이티브’로 규정하는 그는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제안으로 버추얼 작곡가 에이미를 탄생시켰고 가상 세계에서의 에이미의 자아와 삶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현실과 연결된 에이미의 활동을 지켜보는 중이다. 한편, 추수가 AI와 협업한 <자기야, 베타월드는 곧 끝나>(2022) 연작은 데이터로 치환된 세계가 좌우할 정보 권력을 예상하게 하면서도 아직 인간에 의한 스테레오 타입이 AI가 발휘하는 능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다.
글 이성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김남시 역, 『예술의 힘』(서울: ㅇㅣㅂㅣ, 2022), 16.
[2]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역,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파주: 문학동네, 2012), 157.
기획: 이성휘 신지현
그래픽 디자인: 불도저
주최 하이트문화재단
후원 하이트진로(주)
작가 | 박론디, 원정백화점, 추수 Rondi Park, WONJEONG DEPARTMENT STORE, TZUSOO |
전시장 | 하이트컬렉션 (HITE Collection, ハイトコレクション) |
주소 | 06075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714 |
오시는 길 | 1. 지하철 이용시: 7호선-청담역(14번출구)에서 하차 후 약 150m 도보 2. 버스 이용시: 간선버스 143, 146, 345번 / 지선버스 2413, 3217, 4318번 탑승, 우리은행청담지점(청담삼익아파트) 정거장 하차 |
기간 | 2022.12.03(토) - 2023.02.12(일) |
관람시간 | 12:00 - 18:00 |
휴일 | 월요일 - 수요일 (성탄절, 새해 첫날 및 설날 연휴 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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