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nd WHITE NOISE : Piú Forte>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종종 노래 중간에 무대 앞으로 고개를 숙여 한 마디를 외치곤 했다고 한다.
“Piu Forte! (더 크게!)”
이는 배우가 대사를 잊을 경우를 대비해 무대 아래 마련된 공간에서 얼굴만 내놓은 채 공연 내내 가이드를 주는 프롬프터를 향해 던지는 문장이었다. 1958년 리스본 국립극장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의 실황녹음이 리마스터링된 CD를 유심히 들어보면 프롬프터의 목소리까지 들리기도 한다. 프롬프터는 그토록 대사를 잊어버린 마리아 칼라스의 요청에 충실하게 목소리를 힘껏 키웠다.
나는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공연을 진행할 때, 무대 위 동선이 이뤄질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 앞으로 다가와 예정에 없던 대사를 던지는 전설적인 배우,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언어를 가진 무대 아래 쥐구멍만한 공간 속에 서서 머리만을 드러낸 공공연하지만 비밀스러워야하는 존재인 프롬프터,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이으며 허공을 가득 채우는 “Piu Forte! (더 크게!)” 라는 문장. 그리고 같은 대사를 함께 고조되는, 다른 볼륨의 목소리로 외치는 다른 두 공간의 두 사람.
이 장면이 나는 미술계의 관계도와 유사하다고 느낀다. 미술계를 이분법으로 움직이게끔하는 주요한 힘 두 가지가 있다면 자본과 언어(이론, 담론, 가십까지)일 것이다. 이 둘은 대개 같은 곳에 있지 못하며 서로의 온도를 극단적으로 표출하기에 바쁘다. 거대한 자본이 있는 곳에 담론이 설 자리는 없고 필요한 담론이 있는 곳에 자본은 종종 외면으로 일관한다. 더불어 주목을 받게되는 담론과 소문은 유행이 되며 자본의 힘을 얻고 그 시점에서부터 본연의 의미와 핵심적 가치는 부식되기 시작한다. 누구나 하게되는 말은 고요히 목 밑으로 차오르는 물이 되고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자본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는 불이 되곤 한다. 이 곳의 지도는 모두가 알면서 보지 않거나 혹은 못한다.
때문에. 머지않아 돈이 돈이 아닌 숫자놀이가 되어버릴 시점을 맞아, 이 곳, 화이트노이즈, 지하의 세계에서 빛을 뿜는 글로리홀의 교집합의 존재란 불가능한 유리와 얼음의 온도와, 고요손의 수줍고 솔직한 모방을 보며 나는 생각해본다. 자본과 유사하게 과도한 매체 자체의 소비에 가치가 잠식된 극단의 언어가 휘몰아친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활발히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은 자본과 함께 언어의 투명한 폭력에 가까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깨지고, 녹고, 부서지고, 증발하고, 잘 보이지 않는 잔해들을 긁어 모아 사라진 잔상을 재건축한다. 화산재를 추억하는 유리를 조각하며 글로리홀은 유구한 과거가 된 빛들을 소환하고 고요손은 그 빛들에 비춰 묵었던 기억과 대화들의 흔적들을 차분하고 반듯하게 추출한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르면서도 유사한 소재와 형상들에 서로를 투영하며 스스로를 반추한다. 그것은 이미 한참 예전에 지나간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움이 신화에 가까운 개념이 되어버린 지금, 가장 새로운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용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언어와는 다르다.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며 가장 사적인 부분을 가지고 자본 및 상반되는 추상 그 자체에 가까운 여러 이해관계들로 빚어진 입체적인 구와 같은 것이다. 예술은 언어가 아닌 이야기로써 말해야한다. 이미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온 이야기일지라도 하고자하는 용기에 나온 이야기는 사라지더라도 잔상을 남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더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이미 오페라계의 스타가 된 이후에도 프롬프터에게 말 걸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극은 멈추지 않을 수 있었고 그녀의 행위는 얄팍한 부끄러움이 아닌 단단한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배우와 프롬프터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더 크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작가 Artists : 글로리홀 Hayne Park, 고요손 Goyoson
협력기획, 글 Co-curator, Text : 조정민 Jungmin Cho
전시 음악 Music : 조월 Jowall
포스터 디자인 & 사운드 Poster Design & Sound : 모임별
*
이번 전시를 끝으로 화이트노이즈는 전시장으로 당분간 쉼에 들어갑니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종종 노래 중간에 무대 앞으로 고개를 숙여 한 마디를 외치곤 했다고 한다.
“Piu Forte! (더 크게!)”
이는 배우가 대사를 잊을 경우를 대비해 무대 아래 마련된 공간에서 얼굴만 내놓은 채 공연 내내 가이드를 주는 프롬프터를 향해 던지는 문장이었다. 1958년 리스본 국립극장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의 실황녹음이 리마스터링된 CD를 유심히 들어보면 프롬프터의 목소리까지 들리기도 한다. 프롬프터는 그토록 대사를 잊어버린 마리아 칼라스의 요청에 충실하게 목소리를 힘껏 키웠다.
나는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공연을 진행할 때, 무대 위 동선이 이뤄질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 앞으로 다가와 예정에 없던 대사를 던지는 전설적인 배우,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언어를 가진 무대 아래 쥐구멍만한 공간 속에 서서 머리만을 드러낸 공공연하지만 비밀스러워야하는 존재인 프롬프터,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이으며 허공을 가득 채우는 “Piu Forte! (더 크게!)” 라는 문장. 그리고 같은 대사를 함께 고조되는, 다른 볼륨의 목소리로 외치는 다른 두 공간의 두 사람.
이 장면이 나는 미술계의 관계도와 유사하다고 느낀다. 미술계를 이분법으로 움직이게끔하는 주요한 힘 두 가지가 있다면 자본과 언어(이론, 담론, 가십까지)일 것이다. 이 둘은 대개 같은 곳에 있지 못하며 서로의 온도를 극단적으로 표출하기에 바쁘다. 거대한 자본이 있는 곳에 담론이 설 자리는 없고 필요한 담론이 있는 곳에 자본은 종종 외면으로 일관한다. 더불어 주목을 받게되는 담론과 소문은 유행이 되며 자본의 힘을 얻고 그 시점에서부터 본연의 의미와 핵심적 가치는 부식되기 시작한다. 누구나 하게되는 말은 고요히 목 밑으로 차오르는 물이 되고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자본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는 불이 되곤 한다. 이 곳의 지도는 모두가 알면서 보지 않거나 혹은 못한다.
때문에. 머지않아 돈이 돈이 아닌 숫자놀이가 되어버릴 시점을 맞아, 이 곳, 화이트노이즈, 지하의 세계에서 빛을 뿜는 글로리홀의 교집합의 존재란 불가능한 유리와 얼음의 온도와, 고요손의 수줍고 솔직한 모방을 보며 나는 생각해본다. 자본과 유사하게 과도한 매체 자체의 소비에 가치가 잠식된 극단의 언어가 휘몰아친 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활발히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은 자본과 함께 언어의 투명한 폭력에 가까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깨지고, 녹고, 부서지고, 증발하고, 잘 보이지 않는 잔해들을 긁어 모아 사라진 잔상을 재건축한다. 화산재를 추억하는 유리를 조각하며 글로리홀은 유구한 과거가 된 빛들을 소환하고 고요손은 그 빛들에 비춰 묵었던 기억과 대화들의 흔적들을 차분하고 반듯하게 추출한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르면서도 유사한 소재와 형상들에 서로를 투영하며 스스로를 반추한다. 그것은 이미 한참 예전에 지나간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움이 신화에 가까운 개념이 되어버린 지금, 가장 새로운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용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언어와는 다르다.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며 가장 사적인 부분을 가지고 자본 및 상반되는 추상 그 자체에 가까운 여러 이해관계들로 빚어진 입체적인 구와 같은 것이다. 예술은 언어가 아닌 이야기로써 말해야한다. 이미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온 이야기일지라도 하고자하는 용기에 나온 이야기는 사라지더라도 잔상을 남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더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이미 오페라계의 스타가 된 이후에도 프롬프터에게 말 걸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극은 멈추지 않을 수 있었고 그녀의 행위는 얄팍한 부끄러움이 아닌 단단한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배우와 프롬프터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더 크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작가 Artists : 글로리홀 Hayne Park, 고요손 Goyoson
협력기획, 글 Co-curator, Text : 조정민 Jungmin Cho
전시 음악 Music : 조월 Jowall
포스터 디자인 & 사운드 Poster Design & Sound : 모임별
*
이번 전시를 끝으로 화이트노이즈는 전시장으로 당분간 쉼에 들어갑니다.
작가 | 글로리홀 Hayne Park, 고요손 Goyoson |
전시장 | 화이트노이즈 (WHITE NOISE, ホワイト・ノイズ) |
주소 | 06584 서울 서초구 방배로42길 31-3 지하1층 |
오시는 길 | 내방역 7번 출구에서 874m |
기간 | 2023.08.18(금) - 09.07(목) |
관람시간 | 14:00-19:00 |
휴일 | 월요일, 화요일 |
S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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