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콜렉티브는 이민선 개인전 《sculpture》를 오는 6.22(목)부터 7.29(토)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도전적으로 “sculpture”, 조각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며 비조각과의 양가적 개념을 재사유하고, 조각이란 실재를 마주하기 위한 정면승부를 시작한다.
오브제 조각, 영상, 소설로 구성된 신작 13점 모두는 바퀴 달린 나무판 좌대 위에 설치되어 있다. 이동형 체제는 작품의 위치에 따라 동선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관람자가 위치를 바꾸면서 상호소통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 포장재, 모래, 밀가루 반죽, 종이 등 가변적이고 가벼운 소재를 매개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외양의 오브제 작업들은 조각적인 것뿐만 아닌 비조각적인 것에 대한 기대 모두를 배반한다. 작품명도 ‘가소로운 대결’, ‘똑바로 딱 서서’, ‘큰 뜻’, ‘먹지도 못하는 거’ 등으로 다소 빈정대거나 회의적으로 명명함으로써 조각 예술 개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물질성과 사물의 신화화와 함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예술가에 부과된 환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조각과 언어, 문학, 건축, 환경이라는 확장된 영역과의 변증법적 구조 안에서 계획된 이민선 작가의 비조각들은, 조각인 척하거나 삐딱한 잣대를 들이대기, 자조적 유머로 무겁고도 가볍게 하기 등으로 개념의 해체와 전복을 시도하지만, 모순적으로 너무나도 일상적인 재생산으로써 휘발되는 공허함을 드러낸다.
포장재와 끈으로 휴먼사이즈보다 살짝 크게 칭칭 묶어 만든 <똑바로 딱 서서>는 마치 독재자의 동상과도 같은 외양을 하고 단단하게 고정된 척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롭고 어정쩡하게 세워져 있다. 300개의 종이컵이 쌓여있는 <소원빌어>도 아슬하게 존재하면서 마치 오고 가는 행인들에 의해 기복적으로 생성된 돌무덤 정도의 일상성을 소환한다. 종이컵마다의 넘버링만이 돌탑과의 차이를 만들지만, 관람자가 직접 컵 사이를 들춰볼 때만 숫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큰 뜻>에서, 나무판에 낙서처럼 새긴 ‘큰 뜻’은 야심 찬 기획, 위대한 예술에 대한 환상을 일상적 충동에 유비함으로써 무력화하는 듯하다.
영상작품 <방문자>와 <제보자>는 작가의 이전 작업형식과 같이 작가 혼자 원맨쇼를 수행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포착한 순간순간들을 기록해둔 동영상들을 활용한다. 이번 신작에서는 작가가 내레이터이자 방문자/제보자로 목소리를 역할에 맞게 변주하여 등장하며, 마치 유명한 TV 시사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연출법을 클리셰로, 특수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사회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척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로써 사건을 다루는 예술가적 행동양식과 태도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인 3편의 단편 소설은 작가 자신의 자서전과 같이 읽히면서, 등장하는 또 다른 한 명의 특정인은 작가의 남편이자 동료 작가임이 추정되어 부부의 예술과 비예술 간 모호한 일상이 소환된다. 먼저 <거짓말>에서는 조용한 주인공인 “그”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인, 즉 작업이 거짓을 얘기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어쨌든 자신이 창조한 작품–사물 앞에서 안도하는 모습을 그린다. <글>에서 글쓰기의 “무지렁이”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다가, 어느 날 시각으로 감각 하는 모든 삶이 글로 변한 것에 기함한다. 결국에 “그”가 조각가로 유명해졌지만, 자기 작품은 글로밖에 볼 수 없었다는 허무한 이야기이다. 조각 개념에 대한 몰두가, 즉 사유와 감각이 특정 담론에 종속되어 있듯이 언어의 우리에 갇혀 결국엔 물질성 자체와 비언어적 실재를 놓쳐버리고, 그저 모순적 시도가 되어버렸을지 모르는 개념적 조각을 환기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자신 있고 확신 가득한 주체자로 살아가는 “그”와 스스로에 자신 없고 의심하는 “그”로 구성된 두 사람이 죽음을 의식하는 차이를 통해 동일자와 타자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작가는 언어를 매개한 질서 체계나 클리셰를 비틀거나 뒤흔들어 사유의 친숙함을 배반하고 자조적 웃음을 유발한다.
오브제와 영상, 그리고 문학 간의 개연성과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정과 배반, 그리고 그사이의 공백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 작가는 지식과 담론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 질서 체계에서의 언어화가 아닌 삐딱하게 보기*로 조각 개념과 조각가의 실재라는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허한 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닌, 왜상의 대상으로서 비조각, 즉 생활형 예술가로 살아가는 예술가도 비예술가도 아닌, 그냥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실재를 포획할 새로운 조각 개념을 발명해 내는 실천으로서 삐딱한 시선으로 조각인 체하고, 친숙한 언어를 부정하고 배반함으로써 제도적 권력 하의 조각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것이다.
*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김소연 번역, 시각과 언어, 1995
오브제 조각, 영상, 소설로 구성된 신작 13점 모두는 바퀴 달린 나무판 좌대 위에 설치되어 있다. 이동형 체제는 작품의 위치에 따라 동선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관람자가 위치를 바꾸면서 상호소통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 포장재, 모래, 밀가루 반죽, 종이 등 가변적이고 가벼운 소재를 매개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외양의 오브제 작업들은 조각적인 것뿐만 아닌 비조각적인 것에 대한 기대 모두를 배반한다. 작품명도 ‘가소로운 대결’, ‘똑바로 딱 서서’, ‘큰 뜻’, ‘먹지도 못하는 거’ 등으로 다소 빈정대거나 회의적으로 명명함으로써 조각 예술 개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물질성과 사물의 신화화와 함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예술가에 부과된 환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조각과 언어, 문학, 건축, 환경이라는 확장된 영역과의 변증법적 구조 안에서 계획된 이민선 작가의 비조각들은, 조각인 척하거나 삐딱한 잣대를 들이대기, 자조적 유머로 무겁고도 가볍게 하기 등으로 개념의 해체와 전복을 시도하지만, 모순적으로 너무나도 일상적인 재생산으로써 휘발되는 공허함을 드러낸다.
포장재와 끈으로 휴먼사이즈보다 살짝 크게 칭칭 묶어 만든 <똑바로 딱 서서>는 마치 독재자의 동상과도 같은 외양을 하고 단단하게 고정된 척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롭고 어정쩡하게 세워져 있다. 300개의 종이컵이 쌓여있는 <소원빌어>도 아슬하게 존재하면서 마치 오고 가는 행인들에 의해 기복적으로 생성된 돌무덤 정도의 일상성을 소환한다. 종이컵마다의 넘버링만이 돌탑과의 차이를 만들지만, 관람자가 직접 컵 사이를 들춰볼 때만 숫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큰 뜻>에서, 나무판에 낙서처럼 새긴 ‘큰 뜻’은 야심 찬 기획, 위대한 예술에 대한 환상을 일상적 충동에 유비함으로써 무력화하는 듯하다.
영상작품 <방문자>와 <제보자>는 작가의 이전 작업형식과 같이 작가 혼자 원맨쇼를 수행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포착한 순간순간들을 기록해둔 동영상들을 활용한다. 이번 신작에서는 작가가 내레이터이자 방문자/제보자로 목소리를 역할에 맞게 변주하여 등장하며, 마치 유명한 TV 시사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연출법을 클리셰로, 특수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사회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척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로써 사건을 다루는 예술가적 행동양식과 태도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인 3편의 단편 소설은 작가 자신의 자서전과 같이 읽히면서, 등장하는 또 다른 한 명의 특정인은 작가의 남편이자 동료 작가임이 추정되어 부부의 예술과 비예술 간 모호한 일상이 소환된다. 먼저 <거짓말>에서는 조용한 주인공인 “그”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인, 즉 작업이 거짓을 얘기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어쨌든 자신이 창조한 작품–사물 앞에서 안도하는 모습을 그린다. <글>에서 글쓰기의 “무지렁이”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다가, 어느 날 시각으로 감각 하는 모든 삶이 글로 변한 것에 기함한다. 결국에 “그”가 조각가로 유명해졌지만, 자기 작품은 글로밖에 볼 수 없었다는 허무한 이야기이다. 조각 개념에 대한 몰두가, 즉 사유와 감각이 특정 담론에 종속되어 있듯이 언어의 우리에 갇혀 결국엔 물질성 자체와 비언어적 실재를 놓쳐버리고, 그저 모순적 시도가 되어버렸을지 모르는 개념적 조각을 환기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자신 있고 확신 가득한 주체자로 살아가는 “그”와 스스로에 자신 없고 의심하는 “그”로 구성된 두 사람이 죽음을 의식하는 차이를 통해 동일자와 타자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작가는 언어를 매개한 질서 체계나 클리셰를 비틀거나 뒤흔들어 사유의 친숙함을 배반하고 자조적 웃음을 유발한다.
오브제와 영상, 그리고 문학 간의 개연성과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정과 배반, 그리고 그사이의 공백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 작가는 지식과 담론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 질서 체계에서의 언어화가 아닌 삐딱하게 보기*로 조각 개념과 조각가의 실재라는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허한 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닌, 왜상의 대상으로서 비조각, 즉 생활형 예술가로 살아가는 예술가도 비예술가도 아닌, 그냥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실재를 포획할 새로운 조각 개념을 발명해 내는 실천으로서 삐딱한 시선으로 조각인 체하고, 친숙한 언어를 부정하고 배반함으로써 제도적 권력 하의 조각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것이다.
*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김소연 번역, 시각과 언어, 1995
작가 | 이민선 |
전시장 | 씨알콜렉티브 (CR Collective, シーアール・コレクティブ) |
주소 | 03988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 120 일심빌딩 2층 |
오시는 길 |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혹은 06번 마을버스를 타고 정류장 – '경성중고, 홍익디자인고등학교앞' 에서 하차. |
기간 | 2023.06.22(목) - 07.29(토) |
관람시간 | 12:00 - 18:00 |
휴일 | 일요일, 월요일, 공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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