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림 개인전
《스크롤》
일시: 2024. 11. 6. (수) – 12. 1. (일)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운영시간: 12: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Jun Hyerim solo exhibition
Scroll
Date : 6. Nov. 2024 – 1.Dec. 2024
Venue : ARTSPACE BOAN 2
Hours : 12PM – 6PM
Closed on Mondays
Free Admission
크레딧
주최/주관 Organized by
전혜림 Jun Hyerim
전시서문 Text
조현아 Jo Hyunah
디자인 Graphic Design
김도영 Kim doyoung
사진촬영 Photography
양이언 Yang Ian
후원 Supported by
서울문화 재단, 서울특별시 SFAC, Seoul Metropotian City
2024 예술 창작지원 지원사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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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축으로 설정한 스크롤링, 이후의 소회
조현아(미술비평)
스크롤
지금 보지 마십시오. 공간을 한 바퀴 스크롤링한 뒤에 읽으십시오.
하지만 지금 면면체가 아닌, ‘그림’만이 보인다면 아래의 질문들과 함께 전시장을 걸어보세요.
→ 형식만이 작업의 실체임을, 보고 계십니까?
↑ 당신께서 살피고 계신 회화가 지시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회화로부터 출발한 회화가 정면성을 벗어나는 회화로 번역되는 과정을 감지하셨나요?
← 기본적인 요소로 틔워낸, 반복적인 재귀적 서사에는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을까요?
→ 저명한 이미지를 지탱하고 있는 배후, 이것은 무엇일까요?
↑ 일시적으로나마, 캔버스로 만든 구조만을 수용하는 곳, 미술의 말이 통용되는 장소에 더할 화두가 있으신가요?
↓ 오래전에 무결해진 회화의 완결성을 파괴하는 화가의 작업은 쓸데없는 짓일까요?
← 형식의 유산을 말하기 위한 카무플라주를 찍은 사진이 감상으로 치환될 수 없다면, 왜일까요?
상하좌우로 스크롤링을 마치셨나요?
그렇다면, 이제 아래의 글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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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계 방향으로, 작가가 《스크롤》을 구현하기 위해 보냈던 시간을 돌아봅시다. 전혜림은 하나의 ‘정면’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와, 찰칵거리는 기계음이 “전시를 보았음”과 대등한 의미로 통용되는 현상을 제어할 방안을 묶어내려 했습니다.1) 회화의 “지지체”로부터 출발한 면면체는 그 실과 중 하나로, 회화가 본래 가지고 있는 영원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현재의 이미지 소비를 조장하는 시스템을 거스르는 대응책입니다.
면면체를 360˚를 맴돌며 면과 면이 구조로서 인식되도록, 마찬가지로 ‘스크롤(Scroll)’이 그의 작업 방식과 결과물을 지칭하는 명사이자 동사로도 기능함을 작가는 조형언어로 언명하고자 분투했습니다. 이는 스크롤링이 미술 상완의 환경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시점에, 회화라는 장르를 통해 발생하는 사의가 과연 이와 평행하게 나아갈 수 있을지를 묻겠다는 동기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로부터 발생된 작품은 하나, 그다음 하나가 달라, 느리게 집적됩니다. 하지만 작품의 맥락을 구축하면서 작가 자신이 몸담은 장르에 최선을 다하는 작업은 가장 진보적인 논지를 견인합니다. 미술이 제시되는 플랫폼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기준으로서 살아남은 회화의 가치와 고유성에 대한 언급은 낡아 보여도, 스펙터클이 아니면 승률이 낮아진다는 편견이 무람없이 발설되는 시대를 비평하는 규범으로서 기한 없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소재보다도 이를 다루는 법을 문제 삼는 전혜림의 작품 〈대수욕圖〉와 〈면면체-대수욕圖〉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대수욕도(Les Grandes Baigneuses)〉(1900-1906)와 그가 생산한 동명의 연작을 기초로, 그 위에 ‘복제의 복제의 복제’인 이미지를 삽입한 회화입니다. 작가는 서양화의 오랜 주제였던 ‘수욕도’를 매개로 세잔이 강조한 구도와 색을 직시하게 했던 입증 장치를 호출했습니다. 세잔이 스스로의 방법론을 연구하며 꾸준히 다작한 정물화처럼 작가는 면면체의 구성을 탐색하며, 이미지는 미완성의 상태로 남을지언정 회화를 구성하는 사고를 관철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작된 〈Dear godfather〉는 종교에 비견하는 가르침을 준 창시자에게 보내는 전언의 첫 문장으로 이해됩니다. 조형과 ‘계율(canon)’로서 가능한 회화를 “계속, 계속, 계속하는 것이 발언이라고”2)믿게 한 대부에게 작품을 향해 가는 태도를 물려받은 작가가, 그릴 대상은 신중하게 골랐으나 그 묘사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설명됩니다. 너무 덧그렸거나, 날려버려 뭉개진 이미지 때문에 면면체의 표면은 “퍼펙트 스킨”3)으로 남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완성도에 편차가 있다는 점은 작품과 초면인 모두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재들은 검색엔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몹시 유명해서 눈을 사로잡는 힘이 센 이미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 점을 역이용해 누구나 알기에 JPG의 상태에서도 정면성을 갖게 된 이미지를 ‘회화’를 돌아볼 방향을 지시하는 인덱스로 사용했습니다. 가령, 〈면면체-댄스〉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액자, 엽서, 에코백, 책갈피에 인쇄하고 전사해서 아우라가 증발된 앙리 마티스의 〈댄스〉(1910)를 소환한 것인데, 작품은 관람자가 그 원형을 찾고자 면면체를 관찰하게 하는 무언의 지시이자, 그것이 본래 캔버스를 지지체 삼았던 ‘회화’였다는 점을 환기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견본처럼, 면면체 읽기와 그럼으로써 평면을 재독하는 연습을 함께 할 수 있는 한 쌍의 작품이 여기, 있습니다. 〈면면체-다비드像↑〉과 〈다비드像↓〉은 작가가 웹 안에서 ‘레토르트 이미지’가 된 조각상을 스크롤링한 방향대로 캔버스에 잘라 배치한 결과입니다. 〈면면체-반가사유像(78호)〉 및 〈반가사유像(83호)〉, 그리고 〈면면체-테레사의 황홀경〉 역시 이미 완벽한 비율로 완성된 작품을 레디메이드 캔버스가 갖춘 고정된 비례에 압축해 재현하지 않고 끊어 옮기는 행위로서 재맥락화되었습니다. 이때 부피와 축이 재설정된 명작의 형상은 수공적으로 그려져 못생겨 보이기까지 하지만, 작가는 면면체가 작가의 손을 거친 ‘회화’임을 드러내는 한편, 정물이 된 이미지가 아무런 이론이나 내러티브에 부역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역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해상도는 나빠도 상관없습니다. 더 확대되지 않는 평면이 내보이는 깨진 픽셀, 뭉개진 썸네일은 작가의 눈과 방법론으로, 번역되어 캔버스로 이동할 테니까요.
이렇게 화가가 회화를 정면에서 오롯하게 관망할 수 없게 만드는 데에 몰두하는 사유 안에는, 하나의 시점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그려낼 수 없다는 세잔의 주장과 한 경지를 향해 방작하는 동양화의 지의(志意)가 동거합니다. 작가는 백 번의 시도를 버리게 되더라도 하나의 이상적인 예술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할 것, 명작을 따라 그렸다고 해서 작가의 회화가 바로 걸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동시에 개별 회화가 유일할 것, 동시대 작가의 의지를 발견하게 하는 작품일 것이라는 까다로운 조건들로4) 회화의 가치를 따져가자고 제언합니다.
사실 작가가 견지해 온 논의를 작품으로부터 포착하는, 눈 밝은 이들은 희소합니다. 그리하여 서양화의 척도로 눈을 키워온 잡종으로서 내부가 무저갱처럼 깊은 동양화를 완상하는 법도, 그리하여 비평할 역량도 전무한 저와 동료들 앞에서 작가의 작품은 종종 오인됩니다. 전혜림 또한 서양화가 차용한 ‘이후의’ 동양화, 디지털 풍화된 이미지, 거대한 미술사의 용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세대로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화두를 고스란히 알리는 데에 수차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탐독하며 얻은, ‘그림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어떻게 그릴지’에 대한 문제에 부지런히 골몰해왔습니다. 동양화가들이 “무엇이 좋은 그림인가”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명화를 좇는 도법을, 〈스크롤(이어진 산수)〉와 같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서양화의 통사로 지속했습니다. 동서양의 명작이 작가의 면면체에서 겹쳐질 때, 그들은 평등하게 구조로 수렴됩니다.
작가는 올 한 해간 “정면에 존재하는 평면의 한계를 ‘시간성’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이자 조건을 스크롤(스크롤링)으로 정의”하는 일에 도전했다고 전했습니다.5) 형식적 고찰 없이 이미지를 나열하는 행위는 기술에 달려있을 뿐 회화를 거쳐 생성되는 논의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그의 강변과, “회화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질문으로 ‘관객의 시간’을 작품이 앗아오겠다는 목적은 회화를 이해하는 박자에 변속을 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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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계 방향으로, 《스크롤》을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봅시다. 작가가 창조한 이미지는 이곳에 없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모두 기존의 시각문화에서 왔다는 점을 상기하면서요. 이때 웹 프리소스, 미술사의 도상,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계속 회화의 매체성을 벗어난 ‘이미지’ 그 자체로 머릿속에 침투합니다. 미끼의 힘이 세기에, 구조에 관한 얘기는 그 완력에 먹혀들어 갈 공산이 큽니다. 특히 작가의 작업이 사진 찍혀 유통될 때, 그가 사용한 이미지와 그가 옹호하는 구조의 힘은 거의 비등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면면체가 보강해야 할 역량은,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 여겨져 온 두 요소가 서로를 밀고 당기는 힘을 통제할 기술입니다. 오인의 감수를 넘어서, 작가의 화두가 그가 상정한 ‘회화’의 조건에 부합한 것으로 감상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의 외피를 못 벗어내더라도, 작업이 현대적이냐 아니냐를 규명할 질문을 심는 자리에서 진일보하여 면면체가 지지체이면서도 내용 자체라는 지각을 싹틔우는 데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가능할 때, 면면체는 회화로서, 예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은 모두가 짧은 스펙터클을 원하는 시대에 다중의 평면 구조로 사유의 시간을 마주하게 만들겠다는, 회화가 잃어버렸다고 조급하게 판정된 특질을 담기 위한 틀을 공들여 강구한 성과로서 값집니다. 면과 면 사이에서 시간을 들여 회화를 보게 하면서도 한 방향에서 사진 찍히지 않겠다는, 그러니까 하나의 회화가 어떤 시점에서는 완성되고, 어떤 지점에서는 분열되게 만들겠다는 결의는 명료한 방법론으로 사료됩니다. 이는 지면, 벽면, 바닥을 거쳐 결국 캔버스로 회귀한 역사에 관한 담화의 범주를 키우고, 미니멀리즘에서 종결된 듯 보였던 그 기본값이, 우리 세대에서는 얼마나 더 생존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연쇄 질문을 독려하므로 작가가 ‘회화하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가 가담한 것은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정설을 받아들이며 성장했으며 회화가 지금도 미치고 있는 영향 안에서 살아가는, 책임을 지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영원한 도전 중 하나입니다. 회화는 언제나 타 매체를 정의하고 미술 제도를 논평하는 기준으로서 미술사를 끌어왔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제까지 기획전 곳곳에 “별첨스프”처럼 놓인 회화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전시장의 구조와 미술을 보는 눈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진 평면 작품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6) 요란하지 않을 뿐, 회화가 기준이 되는 “매체, 기술, 장르, 절차, 제도”7)가 살아있으므로, 남은 회화의 시대에 회화로서, 작가는 맞섭니다.
면면체를 축으로 돌며, 작품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질문을 정리하고 함께 답을 강구하는 일은 미술의 언어를 구전해야 할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전시장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는 활동은 무가치해 보여도, 작가의 작업 추진 구조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효과적인 원조입니다. 이때, 생각의 매체로서 부동해 온 회화의 가치는 지속될 것입니다.8) 그렇다면, 회화의 담론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개인의 언어로, 그 후 전시장으로 회귀함으로서 무화(無化)로부터 멀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표면과 달리 이데아를 찾아 떠났다가 ‘재귀미로’에 갇힌 사람의 깊은 고독이 잠재된, 면면체의 개념에 당도하기까지 열심으로 삽질한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 꽤 오랜 시간 머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제, 면면체의 군집 밖으로 나오셨겠지요?
그러나 《스크롤》로부터 발생한 맥락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한동안 지속될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면면체는 흔들릴지언정, 회화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정돈하고, 축적한 질문 자체로서 버티고 섰기 때문입니다. 전혜림이 10여 년간 매진해온 질문, 그 회화의 여러 얼굴이 어떤 논제로 각각 정착하는지를 며칠간, 몇 달간, 혹은 몇 년간 아울러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들이, 우리의 회화와 미술을 끌어가는 정제된 호응으로 언젠가 다시 엮이게 될 시점을 고대합니다.
1) 2015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 전혜림과의 인터뷰, 2024년 9월 21일, 서계동.
2) 위의 인터뷰, 2024년 9월 21일, 서계동.
3) 전혜림, 〈퍼펙트 스킨(Perfect Skin)〉, 2018, 혼합매체.
4) 전혜림, 〈이발소, 구영, 티에폴로〉, 2017, 혼합매체.
5) 전혜림과의 인터뷰 중 전혜림이 써 준 기획의 글, 2024년 10월 19일, 서계동.
6) 전혜림과의 인터뷰 중 전혜림의 말, 2024년 10월 19일, 서계동.
7) “그러나 회화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기존의 영역을 떠난지 오래되었으며, 이제는 다른 예술 형식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회화를 매체, 기법, 장르, 절차 또는 제도의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Birnbaum, Daniel, Isabelle Graw, Nikolaus Hirsch(Eds.). Thinking through Painting: Reflexivity and Agency beyond the Canvas, Sternberg Press, 2012, p.45.
8) “이는 회화가 도전적인 물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지적으로 까다로운 활동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위의 책, p.53.
《스크롤》
일시: 2024. 11. 6. (수) – 12. 1. (일)
장소: 아트스페이스 보안 2
운영시간: 12: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Jun Hyerim solo exhibition
Scroll
Date : 6. Nov. 2024 – 1.Dec. 2024
Venue : ARTSPACE BOAN 2
Hours : 12PM – 6PM
Closed on Mondays
Free Admission
크레딧
주최/주관 Organized by
전혜림 Jun Hyerim
전시서문 Text
조현아 Jo Hyunah
디자인 Graphic Design
김도영 Kim doyoung
사진촬영 Photography
양이언 Yang Ian
후원 Supported by
서울문화 재단, 서울특별시 SFAC, Seoul Metropotian City
2024 예술 창작지원 지원사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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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축으로 설정한 스크롤링, 이후의 소회
조현아(미술비평)
스크롤
지금 보지 마십시오. 공간을 한 바퀴 스크롤링한 뒤에 읽으십시오.
하지만 지금 면면체가 아닌, ‘그림’만이 보인다면 아래의 질문들과 함께 전시장을 걸어보세요.
→ 형식만이 작업의 실체임을, 보고 계십니까?
↑ 당신께서 살피고 계신 회화가 지시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회화로부터 출발한 회화가 정면성을 벗어나는 회화로 번역되는 과정을 감지하셨나요?
← 기본적인 요소로 틔워낸, 반복적인 재귀적 서사에는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을까요?
→ 저명한 이미지를 지탱하고 있는 배후, 이것은 무엇일까요?
↑ 일시적으로나마, 캔버스로 만든 구조만을 수용하는 곳, 미술의 말이 통용되는 장소에 더할 화두가 있으신가요?
↓ 오래전에 무결해진 회화의 완결성을 파괴하는 화가의 작업은 쓸데없는 짓일까요?
← 형식의 유산을 말하기 위한 카무플라주를 찍은 사진이 감상으로 치환될 수 없다면, 왜일까요?
상하좌우로 스크롤링을 마치셨나요?
그렇다면, 이제 아래의 글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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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계 방향으로, 작가가 《스크롤》을 구현하기 위해 보냈던 시간을 돌아봅시다. 전혜림은 하나의 ‘정면’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와, 찰칵거리는 기계음이 “전시를 보았음”과 대등한 의미로 통용되는 현상을 제어할 방안을 묶어내려 했습니다.1) 회화의 “지지체”로부터 출발한 면면체는 그 실과 중 하나로, 회화가 본래 가지고 있는 영원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현재의 이미지 소비를 조장하는 시스템을 거스르는 대응책입니다.
면면체를 360˚를 맴돌며 면과 면이 구조로서 인식되도록, 마찬가지로 ‘스크롤(Scroll)’이 그의 작업 방식과 결과물을 지칭하는 명사이자 동사로도 기능함을 작가는 조형언어로 언명하고자 분투했습니다. 이는 스크롤링이 미술 상완의 환경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시점에, 회화라는 장르를 통해 발생하는 사의가 과연 이와 평행하게 나아갈 수 있을지를 묻겠다는 동기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로부터 발생된 작품은 하나, 그다음 하나가 달라, 느리게 집적됩니다. 하지만 작품의 맥락을 구축하면서 작가 자신이 몸담은 장르에 최선을 다하는 작업은 가장 진보적인 논지를 견인합니다. 미술이 제시되는 플랫폼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기준으로서 살아남은 회화의 가치와 고유성에 대한 언급은 낡아 보여도, 스펙터클이 아니면 승률이 낮아진다는 편견이 무람없이 발설되는 시대를 비평하는 규범으로서 기한 없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소재보다도 이를 다루는 법을 문제 삼는 전혜림의 작품 〈대수욕圖〉와 〈면면체-대수욕圖〉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대수욕도(Les Grandes Baigneuses)〉(1900-1906)와 그가 생산한 동명의 연작을 기초로, 그 위에 ‘복제의 복제의 복제’인 이미지를 삽입한 회화입니다. 작가는 서양화의 오랜 주제였던 ‘수욕도’를 매개로 세잔이 강조한 구도와 색을 직시하게 했던 입증 장치를 호출했습니다. 세잔이 스스로의 방법론을 연구하며 꾸준히 다작한 정물화처럼 작가는 면면체의 구성을 탐색하며, 이미지는 미완성의 상태로 남을지언정 회화를 구성하는 사고를 관철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작된 〈Dear godfather〉는 종교에 비견하는 가르침을 준 창시자에게 보내는 전언의 첫 문장으로 이해됩니다. 조형과 ‘계율(canon)’로서 가능한 회화를 “계속, 계속, 계속하는 것이 발언이라고”2)믿게 한 대부에게 작품을 향해 가는 태도를 물려받은 작가가, 그릴 대상은 신중하게 골랐으나 그 묘사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설명됩니다. 너무 덧그렸거나, 날려버려 뭉개진 이미지 때문에 면면체의 표면은 “퍼펙트 스킨”3)으로 남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완성도에 편차가 있다는 점은 작품과 초면인 모두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재들은 검색엔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몹시 유명해서 눈을 사로잡는 힘이 센 이미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 점을 역이용해 누구나 알기에 JPG의 상태에서도 정면성을 갖게 된 이미지를 ‘회화’를 돌아볼 방향을 지시하는 인덱스로 사용했습니다. 가령, 〈면면체-댄스〉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액자, 엽서, 에코백, 책갈피에 인쇄하고 전사해서 아우라가 증발된 앙리 마티스의 〈댄스〉(1910)를 소환한 것인데, 작품은 관람자가 그 원형을 찾고자 면면체를 관찰하게 하는 무언의 지시이자, 그것이 본래 캔버스를 지지체 삼았던 ‘회화’였다는 점을 환기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견본처럼, 면면체 읽기와 그럼으로써 평면을 재독하는 연습을 함께 할 수 있는 한 쌍의 작품이 여기, 있습니다. 〈면면체-다비드像↑〉과 〈다비드像↓〉은 작가가 웹 안에서 ‘레토르트 이미지’가 된 조각상을 스크롤링한 방향대로 캔버스에 잘라 배치한 결과입니다. 〈면면체-반가사유像(78호)〉 및 〈반가사유像(83호)〉, 그리고 〈면면체-테레사의 황홀경〉 역시 이미 완벽한 비율로 완성된 작품을 레디메이드 캔버스가 갖춘 고정된 비례에 압축해 재현하지 않고 끊어 옮기는 행위로서 재맥락화되었습니다. 이때 부피와 축이 재설정된 명작의 형상은 수공적으로 그려져 못생겨 보이기까지 하지만, 작가는 면면체가 작가의 손을 거친 ‘회화’임을 드러내는 한편, 정물이 된 이미지가 아무런 이론이나 내러티브에 부역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역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해상도는 나빠도 상관없습니다. 더 확대되지 않는 평면이 내보이는 깨진 픽셀, 뭉개진 썸네일은 작가의 눈과 방법론으로, 번역되어 캔버스로 이동할 테니까요.
이렇게 화가가 회화를 정면에서 오롯하게 관망할 수 없게 만드는 데에 몰두하는 사유 안에는, 하나의 시점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그려낼 수 없다는 세잔의 주장과 한 경지를 향해 방작하는 동양화의 지의(志意)가 동거합니다. 작가는 백 번의 시도를 버리게 되더라도 하나의 이상적인 예술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할 것, 명작을 따라 그렸다고 해서 작가의 회화가 바로 걸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동시에 개별 회화가 유일할 것, 동시대 작가의 의지를 발견하게 하는 작품일 것이라는 까다로운 조건들로4) 회화의 가치를 따져가자고 제언합니다.
사실 작가가 견지해 온 논의를 작품으로부터 포착하는, 눈 밝은 이들은 희소합니다. 그리하여 서양화의 척도로 눈을 키워온 잡종으로서 내부가 무저갱처럼 깊은 동양화를 완상하는 법도, 그리하여 비평할 역량도 전무한 저와 동료들 앞에서 작가의 작품은 종종 오인됩니다. 전혜림 또한 서양화가 차용한 ‘이후의’ 동양화, 디지털 풍화된 이미지, 거대한 미술사의 용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세대로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화두를 고스란히 알리는 데에 수차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탐독하며 얻은, ‘그림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어떻게 그릴지’에 대한 문제에 부지런히 골몰해왔습니다. 동양화가들이 “무엇이 좋은 그림인가”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명화를 좇는 도법을, 〈스크롤(이어진 산수)〉와 같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서양화의 통사로 지속했습니다. 동서양의 명작이 작가의 면면체에서 겹쳐질 때, 그들은 평등하게 구조로 수렴됩니다.
작가는 올 한 해간 “정면에 존재하는 평면의 한계를 ‘시간성’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이자 조건을 스크롤(스크롤링)으로 정의”하는 일에 도전했다고 전했습니다.5) 형식적 고찰 없이 이미지를 나열하는 행위는 기술에 달려있을 뿐 회화를 거쳐 생성되는 논의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그의 강변과, “회화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질문으로 ‘관객의 시간’을 작품이 앗아오겠다는 목적은 회화를 이해하는 박자에 변속을 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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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계 방향으로, 《스크롤》을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봅시다. 작가가 창조한 이미지는 이곳에 없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모두 기존의 시각문화에서 왔다는 점을 상기하면서요. 이때 웹 프리소스, 미술사의 도상,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계속 회화의 매체성을 벗어난 ‘이미지’ 그 자체로 머릿속에 침투합니다. 미끼의 힘이 세기에, 구조에 관한 얘기는 그 완력에 먹혀들어 갈 공산이 큽니다. 특히 작가의 작업이 사진 찍혀 유통될 때, 그가 사용한 이미지와 그가 옹호하는 구조의 힘은 거의 비등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면면체가 보강해야 할 역량은,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 여겨져 온 두 요소가 서로를 밀고 당기는 힘을 통제할 기술입니다. 오인의 감수를 넘어서, 작가의 화두가 그가 상정한 ‘회화’의 조건에 부합한 것으로 감상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전통적인 회화의 외피를 못 벗어내더라도, 작업이 현대적이냐 아니냐를 규명할 질문을 심는 자리에서 진일보하여 면면체가 지지체이면서도 내용 자체라는 지각을 싹틔우는 데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가능할 때, 면면체는 회화로서, 예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은 모두가 짧은 스펙터클을 원하는 시대에 다중의 평면 구조로 사유의 시간을 마주하게 만들겠다는, 회화가 잃어버렸다고 조급하게 판정된 특질을 담기 위한 틀을 공들여 강구한 성과로서 값집니다. 면과 면 사이에서 시간을 들여 회화를 보게 하면서도 한 방향에서 사진 찍히지 않겠다는, 그러니까 하나의 회화가 어떤 시점에서는 완성되고, 어떤 지점에서는 분열되게 만들겠다는 결의는 명료한 방법론으로 사료됩니다. 이는 지면, 벽면, 바닥을 거쳐 결국 캔버스로 회귀한 역사에 관한 담화의 범주를 키우고, 미니멀리즘에서 종결된 듯 보였던 그 기본값이, 우리 세대에서는 얼마나 더 생존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연쇄 질문을 독려하므로 작가가 ‘회화하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가 가담한 것은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정설을 받아들이며 성장했으며 회화가 지금도 미치고 있는 영향 안에서 살아가는, 책임을 지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영원한 도전 중 하나입니다. 회화는 언제나 타 매체를 정의하고 미술 제도를 논평하는 기준으로서 미술사를 끌어왔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제까지 기획전 곳곳에 “별첨스프”처럼 놓인 회화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전시장의 구조와 미술을 보는 눈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진 평면 작품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6) 요란하지 않을 뿐, 회화가 기준이 되는 “매체, 기술, 장르, 절차, 제도”7)가 살아있으므로, 남은 회화의 시대에 회화로서, 작가는 맞섭니다.
면면체를 축으로 돌며, 작품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질문을 정리하고 함께 답을 강구하는 일은 미술의 언어를 구전해야 할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전시장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는 활동은 무가치해 보여도, 작가의 작업 추진 구조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효과적인 원조입니다. 이때, 생각의 매체로서 부동해 온 회화의 가치는 지속될 것입니다.8) 그렇다면, 회화의 담론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개인의 언어로, 그 후 전시장으로 회귀함으로서 무화(無化)로부터 멀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표면과 달리 이데아를 찾아 떠났다가 ‘재귀미로’에 갇힌 사람의 깊은 고독이 잠재된, 면면체의 개념에 당도하기까지 열심으로 삽질한 흔적이 가득한 공간에 꽤 오랜 시간 머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이제, 면면체의 군집 밖으로 나오셨겠지요?
그러나 《스크롤》로부터 발생한 맥락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한동안 지속될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면면체는 흔들릴지언정, 회화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정돈하고, 축적한 질문 자체로서 버티고 섰기 때문입니다. 전혜림이 10여 년간 매진해온 질문, 그 회화의 여러 얼굴이 어떤 논제로 각각 정착하는지를 며칠간, 몇 달간, 혹은 몇 년간 아울러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들이, 우리의 회화와 미술을 끌어가는 정제된 호응으로 언젠가 다시 엮이게 될 시점을 고대합니다.
1) 2015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 전혜림과의 인터뷰, 2024년 9월 21일, 서계동.
2) 위의 인터뷰, 2024년 9월 21일, 서계동.
3) 전혜림, 〈퍼펙트 스킨(Perfect Skin)〉, 2018, 혼합매체.
4) 전혜림, 〈이발소, 구영, 티에폴로〉, 2017, 혼합매체.
5) 전혜림과의 인터뷰 중 전혜림이 써 준 기획의 글, 2024년 10월 19일, 서계동.
6) 전혜림과의 인터뷰 중 전혜림의 말, 2024년 10월 19일, 서계동.
7) “그러나 회화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기존의 영역을 떠난지 오래되었으며, 이제는 다른 예술 형식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회화를 매체, 기법, 장르, 절차 또는 제도의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Birnbaum, Daniel, Isabelle Graw, Nikolaus Hirsch(Eds.). Thinking through Painting: Reflexivity and Agency beyond the Canvas, Sternberg Press, 2012, p.45.
8) “이는 회화가 도전적인 물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지적으로 까다로운 활동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위의 책, p.53.
작가 | 전혜림 |
전시장 | 아트스페이스 보안 (アートスペース・ボアン, ARTSPACE BOAN) 2 |
주소 | 03044 서울 종로구 효자로 33 |
오시는 길 | 지하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453m |
기간 | 2024.11.06(수) - 12.01(일) |
관람시간 | 12:00-18:00 |
휴일 |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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