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은 2024년 10월 30일(수)부터 12월 14일(토)까지 쑨쉰(SUN Xun, b. 1980) 개인전 《영웅과 마술사》를 연다. 다양한 매체 및 기법의 실험을 통해 뚜렷한 주제의식을 구축하여 온 쑨쉰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조명하는 자리다. 동시대 중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쑨쉰은 중국과 미국, 유럽, 아시아 각지의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국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최근 작품세계의 중심 축을 이루는 것은 회화 작품을 이용해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초당 수십 장의 프레임을 모두 직접 그린 회화 이미지로 구성하여 제작한다. 쑨쉰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2016년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의 기획전에 선보였고 2017년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상영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현재 파리 퐁피두센터의 단체전 《중국: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Chine: A New Generation of Artists)》(2024-2025)에 참가 중이다. 이번 전시는 쑨쉰이 국내에서 7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와 함께 유화 및 목판 부조 원화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3개 층에서 다채롭게 선보인다.
전시주제
영웅과 마술사: 상이한 두 세계 연결 짓는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쑨쉰은 은유적 이미지와 환상적 서사, 유려한 필획으로 점철된 특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는 수공예에 가깝도록 정교한 드로잉과 회화, 목판 부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등 재료 및 매체를 폭넓게 아우르며 실험을 거듭한다. 쑨쉰의 근작 화폭에 묘사된 서커스의 동물들은 동아시아 전통에 깃든 무속과 토속신앙을 연상시킨다. 마술적 분위기의 허구세계 속 의인화된 동물들이 강렬한 필치와 색채로서 구현된다. 작가가 언급하기를 “인간 세상 또한 서커스와 같다.” 약속된 규범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질서정연한 일상이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호랑이의 서커스와 다름 없다는 이야기다. 팬데믹 기간 동안의 삶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 고무시켰다.
쑨쉰의 작품세계 내에서 부엉이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바라보는 초월적 존재로서 그려진다. 부엉이는 각각의 동공을 독립적으로 확장하거나 수축할 수 있어 두 눈에 들어오는 빛의 조도를 매우 정밀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알려진다. 많은 야생동물의 시력은 인간보다 뛰어나고, 청각과 후각 또한 예민하다. 작가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이 실제 세상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인간이 볼 수 없는 진실을 목격하는 비인간 존재들의 지위를 격상시킨다. 관객을 응시하는 거대한 동물들과 그로부터 도망치는 작은 사람들, 텅 빈 연극 무대의 생경한 장면은 인간과 비인간,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시선 및 입장을 전복시키며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제기한다.
그의 화면에는 짐승의 탈을 쓰고 의식을 행하는 샤먼(shaman)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소통을 중개하는 영매와 같은 존재이다. 샤먼의 어원인 ‘사만(saman)’은 고대 퉁구스어로,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는 종교적 능력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쑨쉰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 짓는 샤먼의 역할에 예술가의 모습을 투영하여 본다. 눈에 보이는 작품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다. 작가는 은유와 상징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이 “온화한 방식”으로서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다.
전시구성 및 작품소개
일련의 출품작은 공통적으로 지난 2019년부터 제작해온 장편영화 〈마법성도(魔法星图)〉(2019-)의 세계관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마법성도〉는 주인공 샤오즈가 여섯 개의 환상적인 나라를 탐험하는 여행기를 장마다 나누어 담은 이야기로서 기획되었다. 현재 제1장 ‘나찰국(螺刹)’과 제2장 ‘고래국(鲸邦)’이 완성을 앞두고 있으며, 각 장에 나누어 펼쳐지는 여섯 나라의 풍경은 목판 부조, 유화, 벽돌화, 세밀화 등 저마다 다른 기법으로 제작된 원화에 토대를 둔다. 이번 전시에서는 목판 부조로 묘사된 ‘나찰국’과 유화로 그린 ‘고래국’ 풍경이 담긴 화면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아라리오갤러리 1층 벽면을 가득 메운 영상작품 〈서커스 속 놀라운 꿈〉(2022-2024)은 〈마법성도〉 제2장 ‘고래국’의 속편인 동시에 독립적 서사를 지닌 단편영화이다. 작가가 설정한 가상세계인 ‘고래국’의 이야기를 담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수많은 초당 프레임들은 모두 작가의 유화 작품을 재료 삼아 제작된다. 〈서커스 속 놀라운 꿈〉의 도입부는 미지의 시공간으로부터 날아든 편지의 모습을 비춘다. 바람을 타고 복수의 풍경을 넘나드는 한 장의 편지는 전체의 서사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매개로서 역할한다. 쑨쉰의 영화적 세계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둔다. 화면은 마치 꿈속의 일들처럼 모호한 단서만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과 문화적 맥락을 더듬어 의미를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부엉이와 공작새, 곰과 호랑이, 말과 문어 등 서커스 동물들이 뒤엉킨 풍경 속에서 천문학자의 머리는 불길에 휩싸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또한 불타오른다. 서커스의 동물들은 ‘고래국’의 주도자가 되어 작은 인간들을 감금한다. 영화 속 세계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는 전복되고, 역사와 지식들은 소멸된다.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인 마술사가 등장한다. 동물의 탈을 뒤집어 쓴 채 주술적 몸짓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샤먼의 모습으로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섯 마리 부엉이 앞에 앉은 다섯 명의 쑨쉰은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쓴 원고를 소리 내어 읽는다. 마치 샤먼이 주문을 외는 듯한 목소리로서다. “망각은 일시적 망각과 영구적 망각으로 나뉜다. 전자는 적절한 조건에서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 망각이고, 후자는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다시는 기억할 수 없는 종류의 망각이다.”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은 모두 일종의 기억 상실인데, 이는 한편 “기억을 강화하는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내용을 잊지 않으면, 필요한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의 독백은 망각과 기억 사이의 긴밀한 공모 관계를 환기하며, 오래된 신념이 무너진 자리에 새롭게 쓰일 또다른 인식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지하1층에 선보이는 유화 연작은 〈마법성도〉 제2장 및 〈서커스 속 놀라운 꿈〉 속 서사의 기원이 되는 원화이다. 두 영화의 공통 주제인 가상국가 ‘고래국’은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때 고래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샤먼과 같은 존재이다.
‘고래국’의 장면들은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찬란한 색채가 돋보이는 유화로 묘사됐다. 반짝이는 레진으로 표면을 마감하여 개별 화면의 양감을 극대화했다. 소형 화면은 단편적인 이야기의 구성요소를 근접화면으로 선보인다. 인류의 역사 속 축적되어온 지식과 문명, 종교와 철학을 상징하는 책과 성상, 보물선 등 사물과 그러한 역사를 불태워 전복하는 화염의 도상이 눈에 띈다. 보다 큰 규모의 화면들은 낱낱의 요소가 모여 이루어낸 거시적 풍경을 비추어 보여준다. 동물과 사물, 인간과 자연은 낯선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초현실적 분위기의 풍경을 구축한다.
아라리오갤러리 3층에서는 보다 앞서 제작된 〈마법성도〉 제1장 ‘나찰국’의 원전을 만나볼 수 있다. ‘나찰국’ 서사의 기초를 이루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드로잉과 다양한 장면 디자인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나찰국’은 극한의 추위가 지속되는 북쪽에 위치한 폐쇄적인 나라다. 역사와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어 지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60년에 한 번, ‘환상몽환제’라는 대규모 축제가 열리면 하늘에서 망각 가루가 흩날려 사람들은 모든 기억을 잃고 역사는 새로 쓰인다.
가상의 세계 ‘나찰국’의 풍경은 나무를 깎아 만든 부조 위에 유채 물감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장면들이 대담하고도 섬세한 획의 기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명확한 윤곽선과 찬란한 색채의 강렬한 대비가 특유의 환상성을 극대화한다. 이세계를 지배하는 도깨비 같은 도상들의 향연이 신비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나찰국’의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과 환희가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환기시킨다.
작가소개
쑨쉰은 1980년 중국 북동부의 광업도시 푸신에서 태어나 중국 문화대혁명 직후의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났다. 성장기에 목도한 시대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세계사 속 사회정치적 현상, 문화, 기억 등의 주제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2005년 중앙미술학원 판화과를 졸업한 뒤 2006년에 파이(π, Pi)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탱크 상하이(중국, 2024), 밴쿠버 아트 갤러리(미국, 2021), 시드니현대미술관(호주, 2018), 세인트루이스미술관(미국, 2018), 상하이 유즈미술관(중국, 2016),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영국, 2014), 민생현대미술관(상하이, 중국, 2010), 뉴욕 드로잉센터(미국, 2009), 로스앤젤레스 해머뮤지엄(미국, 2008)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뉴욕,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뉴욕 미국), 에르미타주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M+뮤지엄(홍콩), 민생현대미술관(베이징, 중국), 상하이당대예술관(중국), 레흠브룩미술관(뒤스부르크, 독일),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타이베이현대미술관(MOCA)(대만), 밴쿠버아트갤러리(캐나다) 등이 연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쑨쉰의 영화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벨기에 등 유럽 전역과 중국, 미국, 러시아 및 아시아 각지에서 개최한 영화제에 선보여 주목받았으며, 국내에서는 제13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2013),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13), 제5-6회 시네마디지털서울_영화제(2011; 2012), 제9-11회 전주국제영화제(2008; 2009; 2010),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2007)에서 조명되었다. 쑨쉰은 제8회 관란 국제판화비엔날레 명예상(중국, 2023), 아시아 아트 게임 체인저 어워드(인도, 2018), 제8회 ACC 아트 차이나(중국, 2014), 중국 컨템포러리 아트 어워드(중국, 2010), 대만 컨템포러리 아트 링크 영 아트 어워드(대만, 2010) 등을 수상하였다.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미국), 해머뮤지엄(미국), M+컬렉션(홍콩), 탱크 상하이(중국), 아라리오뮤지엄(한국) 외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재단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주제
영웅과 마술사: 상이한 두 세계 연결 짓는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쑨쉰은 은유적 이미지와 환상적 서사, 유려한 필획으로 점철된 특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는 수공예에 가깝도록 정교한 드로잉과 회화, 목판 부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등 재료 및 매체를 폭넓게 아우르며 실험을 거듭한다. 쑨쉰의 근작 화폭에 묘사된 서커스의 동물들은 동아시아 전통에 깃든 무속과 토속신앙을 연상시킨다. 마술적 분위기의 허구세계 속 의인화된 동물들이 강렬한 필치와 색채로서 구현된다. 작가가 언급하기를 “인간 세상 또한 서커스와 같다.” 약속된 규범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질서정연한 일상이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호랑이의 서커스와 다름 없다는 이야기다. 팬데믹 기간 동안의 삶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 고무시켰다.
쑨쉰의 작품세계 내에서 부엉이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바라보는 초월적 존재로서 그려진다. 부엉이는 각각의 동공을 독립적으로 확장하거나 수축할 수 있어 두 눈에 들어오는 빛의 조도를 매우 정밀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알려진다. 많은 야생동물의 시력은 인간보다 뛰어나고, 청각과 후각 또한 예민하다. 작가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이 실제 세상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인간이 볼 수 없는 진실을 목격하는 비인간 존재들의 지위를 격상시킨다. 관객을 응시하는 거대한 동물들과 그로부터 도망치는 작은 사람들, 텅 빈 연극 무대의 생경한 장면은 인간과 비인간,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시선 및 입장을 전복시키며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제기한다.
그의 화면에는 짐승의 탈을 쓰고 의식을 행하는 샤먼(shaman)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소통을 중개하는 영매와 같은 존재이다. 샤먼의 어원인 ‘사만(saman)’은 고대 퉁구스어로,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는 종교적 능력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쑨쉰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 짓는 샤먼의 역할에 예술가의 모습을 투영하여 본다. 눈에 보이는 작품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다. 작가는 은유와 상징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이 “온화한 방식”으로서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다.
전시구성 및 작품소개
일련의 출품작은 공통적으로 지난 2019년부터 제작해온 장편영화 〈마법성도(魔法星图)〉(2019-)의 세계관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마법성도〉는 주인공 샤오즈가 여섯 개의 환상적인 나라를 탐험하는 여행기를 장마다 나누어 담은 이야기로서 기획되었다. 현재 제1장 ‘나찰국(螺刹)’과 제2장 ‘고래국(鲸邦)’이 완성을 앞두고 있으며, 각 장에 나누어 펼쳐지는 여섯 나라의 풍경은 목판 부조, 유화, 벽돌화, 세밀화 등 저마다 다른 기법으로 제작된 원화에 토대를 둔다. 이번 전시에서는 목판 부조로 묘사된 ‘나찰국’과 유화로 그린 ‘고래국’ 풍경이 담긴 화면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아라리오갤러리 1층 벽면을 가득 메운 영상작품 〈서커스 속 놀라운 꿈〉(2022-2024)은 〈마법성도〉 제2장 ‘고래국’의 속편인 동시에 독립적 서사를 지닌 단편영화이다. 작가가 설정한 가상세계인 ‘고래국’의 이야기를 담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수많은 초당 프레임들은 모두 작가의 유화 작품을 재료 삼아 제작된다. 〈서커스 속 놀라운 꿈〉의 도입부는 미지의 시공간으로부터 날아든 편지의 모습을 비춘다. 바람을 타고 복수의 풍경을 넘나드는 한 장의 편지는 전체의 서사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매개로서 역할한다. 쑨쉰의 영화적 세계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둔다. 화면은 마치 꿈속의 일들처럼 모호한 단서만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과 문화적 맥락을 더듬어 의미를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부엉이와 공작새, 곰과 호랑이, 말과 문어 등 서커스 동물들이 뒤엉킨 풍경 속에서 천문학자의 머리는 불길에 휩싸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또한 불타오른다. 서커스의 동물들은 ‘고래국’의 주도자가 되어 작은 인간들을 감금한다. 영화 속 세계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는 전복되고, 역사와 지식들은 소멸된다.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인 마술사가 등장한다. 동물의 탈을 뒤집어 쓴 채 주술적 몸짓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샤먼의 모습으로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섯 마리 부엉이 앞에 앉은 다섯 명의 쑨쉰은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쓴 원고를 소리 내어 읽는다. 마치 샤먼이 주문을 외는 듯한 목소리로서다. “망각은 일시적 망각과 영구적 망각으로 나뉜다. 전자는 적절한 조건에서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 망각이고, 후자는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다시는 기억할 수 없는 종류의 망각이다.”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은 모두 일종의 기억 상실인데, 이는 한편 “기억을 강화하는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내용을 잊지 않으면, 필요한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의 독백은 망각과 기억 사이의 긴밀한 공모 관계를 환기하며, 오래된 신념이 무너진 자리에 새롭게 쓰일 또다른 인식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지하1층에 선보이는 유화 연작은 〈마법성도〉 제2장 및 〈서커스 속 놀라운 꿈〉 속 서사의 기원이 되는 원화이다. 두 영화의 공통 주제인 가상국가 ‘고래국’은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때 고래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샤먼과 같은 존재이다.
‘고래국’의 장면들은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찬란한 색채가 돋보이는 유화로 묘사됐다. 반짝이는 레진으로 표면을 마감하여 개별 화면의 양감을 극대화했다. 소형 화면은 단편적인 이야기의 구성요소를 근접화면으로 선보인다. 인류의 역사 속 축적되어온 지식과 문명, 종교와 철학을 상징하는 책과 성상, 보물선 등 사물과 그러한 역사를 불태워 전복하는 화염의 도상이 눈에 띈다. 보다 큰 규모의 화면들은 낱낱의 요소가 모여 이루어낸 거시적 풍경을 비추어 보여준다. 동물과 사물, 인간과 자연은 낯선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초현실적 분위기의 풍경을 구축한다.
아라리오갤러리 3층에서는 보다 앞서 제작된 〈마법성도〉 제1장 ‘나찰국’의 원전을 만나볼 수 있다. ‘나찰국’ 서사의 기초를 이루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드로잉과 다양한 장면 디자인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나찰국’은 극한의 추위가 지속되는 북쪽에 위치한 폐쇄적인 나라다. 역사와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어 지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60년에 한 번, ‘환상몽환제’라는 대규모 축제가 열리면 하늘에서 망각 가루가 흩날려 사람들은 모든 기억을 잃고 역사는 새로 쓰인다.
가상의 세계 ‘나찰국’의 풍경은 나무를 깎아 만든 부조 위에 유채 물감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장면들이 대담하고도 섬세한 획의 기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명확한 윤곽선과 찬란한 색채의 강렬한 대비가 특유의 환상성을 극대화한다. 이세계를 지배하는 도깨비 같은 도상들의 향연이 신비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나찰국’의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과 환희가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환기시킨다.
작가소개
쑨쉰은 1980년 중국 북동부의 광업도시 푸신에서 태어나 중국 문화대혁명 직후의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났다. 성장기에 목도한 시대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세계사 속 사회정치적 현상, 문화, 기억 등의 주제를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2005년 중앙미술학원 판화과를 졸업한 뒤 2006년에 파이(π, Pi)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탱크 상하이(중국, 2024), 밴쿠버 아트 갤러리(미국, 2021), 시드니현대미술관(호주, 2018), 세인트루이스미술관(미국, 2018), 상하이 유즈미술관(중국, 2016),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영국, 2014), 민생현대미술관(상하이, 중국, 2010), 뉴욕 드로잉센터(미국, 2009), 로스앤젤레스 해머뮤지엄(미국, 2008)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뉴욕,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뉴욕 미국), 에르미타주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M+뮤지엄(홍콩), 민생현대미술관(베이징, 중국), 상하이당대예술관(중국), 레흠브룩미술관(뒤스부르크, 독일),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 타이베이현대미술관(MOCA)(대만), 밴쿠버아트갤러리(캐나다) 등이 연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쑨쉰의 영화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벨기에 등 유럽 전역과 중국, 미국, 러시아 및 아시아 각지에서 개최한 영화제에 선보여 주목받았으며, 국내에서는 제13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 페스티벌(2013),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13), 제5-6회 시네마디지털서울_영화제(2011; 2012), 제9-11회 전주국제영화제(2008; 2009; 2010),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2007)에서 조명되었다. 쑨쉰은 제8회 관란 국제판화비엔날레 명예상(중국, 2023), 아시아 아트 게임 체인저 어워드(인도, 2018), 제8회 ACC 아트 차이나(중국, 2014), 중국 컨템포러리 아트 어워드(중국, 2010), 대만 컨템포러리 아트 링크 영 아트 어워드(대만, 2010) 등을 수상하였다.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미국), 해머뮤지엄(미국), M+컬렉션(홍콩), 탱크 상하이(중국), 아라리오뮤지엄(한국) 외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재단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가 | 쑨쉰(SUN Xun) |
전시장 |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ARARIO GALLERY SEOUL, アラリオギャラリー・ソウル) 1F, B1F, 3F |
주소 | 03058 서울 종로구 율곡로 85 아라리오갤러리 |
오시는 길 |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181m |
기간 | 2024.10.30(수) - 12.14(토) |
관람시간 | 11:00-18:00 |
휴일 | 일요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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