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제 목: 《미친 뱀에게 경배를》 (Worship of The Mad Snake)
참 여 작 가: 이준아(Juna Lee)
일 자: 2024년 10월 5일(토) – 10월 30일(수)
일 시: 11:00 – 18:30 (매주 월요일 휴일)
장 소: 더 윌로(The WilloW, 서울시 동대문구 고산자로36길 38, 2층)
입 장 료: 무료
웹 사 이 트: thewillow1955.com
문 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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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요약)
“뱀은 껍질이 바뀌어도 같은 뱀이다.1)”
신재민 (큐레이터)
작가 이준아는 2023년 d/p에서의 개인전 《나는 어두운 숲 속을 걷고 있지만 별들은 흔들리지 않지》에서 그간 이어온 우연의 기법에 근거한 추상 회화의 근원을 아버지로부터 찾아왔다면, 2024년 10월 5일 토요일부터 10월 30일 수요일까지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더 윌로(The WilloW)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 《미친 뱀에게 경배를》에서는 아버지를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칼 융(Carl Jung)과 같은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지난 개인전에서 작가는 아버지라는 대상을 ‘나의 아버지’로서 개인적 미시사에 머물게 하기보다, 양극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지성인이자 광기의 역사 속 학문적 성취에 이르지 못한 인물로 객관화해 바라보았다면, 한발 나아간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를 기억의 담지체로서 바라보면서 미술사에 인류학적 접근을 도입했던 바르부르크, 그리고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이미지의 원형을 좇은 융과 동일선상에 아버지를 배치한다. 부재한 아버지를, 마찬가지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당대의 학자들과 동일한 위상에 놓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역사적 인물들을 참조점으로 삼아 작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사적인 차원을 넘어 보편을 재구성하는 특이성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발산/수렴, 이성/비이성, 동양/서양, 주술/과학, 우연/논리, 선/악과 같은 양극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아슬아슬 균형을 잡되 때로는 미끄러지는 작가의 실천은 격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뱀 도상과 중앙으로 수렴하는 만다라, 그리고 순환과 재생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번 전시 《미친 뱀에게 경배를》은 다섯 폭으로 이루어진 다패널화 <뱀의 기적>과 이와 후면을 맞댄 상태로 배치되는 다섯 폭의 다패널화 <만다라> 연작이 더 윌로(The WilloW)의 메인 전시장을 채우며, 우로보로스와 종교적 이미지, 그리고 해/달이 한 화면에 놓이는 <해>와 <달> 연작이 복도 공간에 놓인다. 후면을 맞대어 대칭적으로 놓인 <뱀의 기적>과 <만다라> 연작은 발산과 수렴의 상반된 양상을 각각의 화면에 분리해 보여준다. 이는 “서로의 존재가 맞서고, 동시에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존재 조건으로 하는 관계”를 가지며, ‘부정’으로 존재하는 화면이 다시 상대의 ‘부정’이 되는 양극성을 표상한다. 또한 두 다패널화는 둘의 관계를 통해 양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양면적 속성을 가지거나(<뱀의 기적>의 뱀과 용) 융합과 초월의 속성을 가지는(<만다라> 연작에 겹쳐져 등장하는 복수의 이미지) 이미지를 활용해 전시의 주제를 보다 심화한다. 다섯 폭으로 이어지는 <뱀의 기적>에서는 1828년 독일 자연사 서적의 삽화에 등장하는 뱀의 도상, 그리고 에도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화가 다와라야 소타쓰(Tawaraya Sōtatsu)의 수묵화와 한국의 민화에서 수집한 용의 도상이 겹쳐져 한 화면에 드러난다. 후면에 놓인 <만다라> 연작(‘천체’, ‘태양새’, ‘여신’, ‘나팔꽃’, ‘알파’)은 하나의 패널에 다섯 종류의 이미지가 겹쳐지는데, 각각은 칼 융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자연 속 만다라를 닮은 형상, 단청의 무늬, 현대의 후광 그래픽 등이다. 복도 공간에 놓인 <해>와 <달> 연작에서는 우로보로스의 이미지 위에 연금술의 핵심 주제이자 집단 무의식의 과정인 변형과 재생의 순환적 성격을 상징하는 해/달의 이미지,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에서 각각 추출한 종교적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 이준아의 작업은 비선형적 시간성 안에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순환하며 재생되는 이미지가 가지는 양극성과 이를 관통하는 초월적인 힘을 이미지의 원형에서 갈구한다. 이를 위해 그의 아버지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문, 잡지, 우표, 삽화, 광고, 광인의 그림과 같이 예술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미지를 불러오며, 본인의 방법론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편집증적인 이미지 수집을 통해 선험적 형상을 중심으로 한 사유를 전개했던 학자들을 소환한다. 또한 작가 이준아의 작품은 두 극이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하는 양극성의 속성을 닮아, 공유된 양극성을 재조명하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열증적 사고의 보편성을 증거하며,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 통합과 융합에 이르는 과정을 내포한다.
주석
1) 아비 바르부르크 저, 김남시 옮김. 뱀 의식: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원제: Bilder aus dem Gebiet der Pueblo-Indianer in Nord-Amerika). 읻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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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천둥이 치는 밤 뱀들은 깊은 물 밑에서 전율하며 춤추었다
이준아 (작가)
천둥이 치는 밤 뱀들은 깊은 물 밑에서 전율하며 춤추었다. 그들을 물살에 부서지는 번갯불을 조각조각 삼켰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둥그런 똬리를 틀고 축축한 하늘에 오르는 날을 기다렸다. 천 년은 살아남기에도 기다리기에도 무구한 시간이었다. 오로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 즉 용이 하늘에 나타난 밤만이 승천하고자 하는 뱀들의 간절한 소망에 불꽃을 일으켜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전두환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되어 고문을 겪고 후유증으로 반평생 정신질환을 앓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재작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갑작스레 작고하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투병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스무 살 무렵 나 역시도 비슷한 정신증을 앓게 되면서 우리는 모종의 치료 공동체를 형성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거의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면서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광증이 주관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까운 이의 광증이 주는 고통을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그제서야 약을 챙겨 드셨다. 아버지와 딸이 모두 정신질환을 앓는다는 것은 절망적인 사실이겠지만 ‘광기’란 적어도 아버지와 나에게는 아주 내밀하고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무엇이었다.
학부 초년생 시절에는 누구나 소위 ‘일기장 작업’을 한다고 한다. 나의 주제는 단연 아버지와 나의 정신병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서사에만 갇혀 맴도는 게 싫어서 개인적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제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선 게 ‘우연’에 관한 회화 작업이었다. 나의 의도나 선택을 가능한 배제하면서 재료가 가진 고유한 물성이나 작업 과정의 직관적 흐름을 따라가는 일은 나의 작가적인 태도에 개방성을 부여하면서 회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조종하지 않아도 그림은 나온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연이라는 주제 안에서 공백으로 비워두려 했던 ‘나’ 자신의 자리에 언제나 ‘나’의 정서와 서사가 자리한다는 모순을 늘 안고 있었다.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다는 작가의 의도라는 자가당착에 봉착해 그림이 갈 길을 잃어갈 즈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다시 나의 서사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헌정한 나의 두 번째 개인전 《나는 어두운 숲 속을 걷고 있지만 별들은 흔들리지 않지》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 우리가 서로 주고받았던 영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후 작업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주제를 나의 삶과 깊은 내면에서 추상적인 형태로 길어 올렸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인력으로 작용해온 ‘광기’였다. 나의 유년시절을 엉망진창으로 비틀어놓았던 아버지의 광기와, 스무 살 이후에는 정신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내 삶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흔들어대던 나의 광기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내가 경험과 사유를 통해 규정하는 광기란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전시는 ‘뱀’을 광기의 상징으로 삼으면서 시작한다. 뱀 중에서도 깊은 연못에 살며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꿈꾸는 이무기다. 불가능한 초월의 욕망을 품고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뱀이다. 그러나 나는 이 뱀이 때때로 미친 몸부림을 친다고 상상했다. 용이 되고 싶어서, 또는 이미 용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섬망에 빠진 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규정하는 광기다. 광증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스스로가 신이라고 믿게 되기 십상이고, 자신이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환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객관성이 무너지고 주관성이 온 정신을 지배하면서 전지 전능감애 빠져든다. 아버지는 그러한 광증을 자신의 초월의 철학과 연관시켰고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버지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패착이었다. 나에게 정신병은 길들여야 하는 성질 사나운 맹견과도 같은 것이었고 잘 가두어 놓아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과 맞물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인간됨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신처럼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곧 광기와 맞닿아 있고, 이는 인간 본성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서 뱀이 인간에게 속삭인 내용이기도 하다.
<만다라>에서 레이어가 겹쳐지듯 뱀 상징은 내게 관념적으로 겹쳐진다. 치유의 상징인 뱀, 지혜의 상징인 뱀, 그리고 칼 융이 인간 자아실현의 완성의 상징으로 삼았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 평생 정신병에 시달리며 자신의 왕성한 지적 욕구에 미치지 못한 결과물을 남겼던 아비 바르부르크의 저작 「뱀 의식」, 칼 세이건이 인간 지성의 상징으로 붙였던 제목인 『에덴의 용』까지.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광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런저런 도상들을 종횡무진하며 이미지를 겹쳐 올린다. 칼 융이 수집한 그림들, 중세 삽화들, 후광을 표현한 도형들,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자연의 무늬들, 단청까지. 거기에는 ‘원’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것은 우로보로스의 형상이기도 하다. 서로 무관한 것들을 확장된 사고로 연관 짓고 통일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인간 지성의 본질이고 그것은 우연한 사건들을 깔때기처럼 모아 자신의 광적 신념으로 융해시키는 광인의 사고와 다르지 않다.
<뱀의 기적>은 용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뱀을 표현하기 위해 용과 뱀을 다룬 동서양의 이미지를 한데 엮은 것이다. 구름 속의 용을 그린 중세 일본 수묵화와 우리나라 용 민화, 근대 독일의 뱀 삽화가 겹쳐져 나타난다. 레이어 밑에 깔린 용의 이미지는 해체되고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것은 고통스러운 듯, 분노한 듯, 환희에 찬 듯 춤을 추는 뱀의 형상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 스스로는 극도의 고양감을 느끼는 데 반해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 그는 고통스럽게 살아 날뛰는 한 개의 초라한 육체다. 나는 그러한 역설적인 느낌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고, 때때로 허물을 벗듯 극한의 시간을 겪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던 아버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규정하는 ‘광기’의 파토스다.
<해>와 <달>은 <만다라>와 <뱀의 기적>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뱀이 꼬리를 물면서 뱀은 원형이 되고 이 원은 해와 달을 연상시키며 영원과 순환을 뜻하는 다른 원형의 상징들과 연결된다. 나는 이에 <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달>에는 관음보살의 이미지를 얹었다. 구체적인 대상은 상이하나 종교와 광기는 모두 영원불멸한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종교가 현실을 초월하듯 광기는 객관을 초월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가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는다면 종교는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기와 종교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구분선이다. 허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현실 초월의 욕구는 때로 광기라는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다라>는 광기의 로고스, <뱀의 기적>은 광기의 파토스, <해>와 <달>은 광기의 에토스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곧 <미친 뱀에게 경배를>, 즉 광기에 다다른 자를 경외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지성의 기저에 깔린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 숨 막히는 심연과도 같은 본질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는 살아남고자 사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여 작 가: 이준아(Juna Lee)
일 자: 2024년 10월 5일(토) – 10월 30일(수)
일 시: 11:00 – 18:30 (매주 월요일 휴일)
장 소: 더 윌로(The WilloW, 서울시 동대문구 고산자로36길 38, 2층)
입 장 료: 무료
웹 사 이 트: thewillow1955.com
문 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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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요약)
“뱀은 껍질이 바뀌어도 같은 뱀이다.1)”
신재민 (큐레이터)
작가 이준아는 2023년 d/p에서의 개인전 《나는 어두운 숲 속을 걷고 있지만 별들은 흔들리지 않지》에서 그간 이어온 우연의 기법에 근거한 추상 회화의 근원을 아버지로부터 찾아왔다면, 2024년 10월 5일 토요일부터 10월 30일 수요일까지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더 윌로(The WilloW)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 《미친 뱀에게 경배를》에서는 아버지를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칼 융(Carl Jung)과 같은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지난 개인전에서 작가는 아버지라는 대상을 ‘나의 아버지’로서 개인적 미시사에 머물게 하기보다, 양극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지성인이자 광기의 역사 속 학문적 성취에 이르지 못한 인물로 객관화해 바라보았다면, 한발 나아간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를 기억의 담지체로서 바라보면서 미술사에 인류학적 접근을 도입했던 바르부르크, 그리고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이미지의 원형을 좇은 융과 동일선상에 아버지를 배치한다. 부재한 아버지를, 마찬가지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당대의 학자들과 동일한 위상에 놓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역사적 인물들을 참조점으로 삼아 작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사적인 차원을 넘어 보편을 재구성하는 특이성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발산/수렴, 이성/비이성, 동양/서양, 주술/과학, 우연/논리, 선/악과 같은 양극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아슬아슬 균형을 잡되 때로는 미끄러지는 작가의 실천은 격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뱀 도상과 중앙으로 수렴하는 만다라, 그리고 순환과 재생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번 전시 《미친 뱀에게 경배를》은 다섯 폭으로 이루어진 다패널화 <뱀의 기적>과 이와 후면을 맞댄 상태로 배치되는 다섯 폭의 다패널화 <만다라> 연작이 더 윌로(The WilloW)의 메인 전시장을 채우며, 우로보로스와 종교적 이미지, 그리고 해/달이 한 화면에 놓이는 <해>와 <달> 연작이 복도 공간에 놓인다. 후면을 맞대어 대칭적으로 놓인 <뱀의 기적>과 <만다라> 연작은 발산과 수렴의 상반된 양상을 각각의 화면에 분리해 보여준다. 이는 “서로의 존재가 맞서고, 동시에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존재 조건으로 하는 관계”를 가지며, ‘부정’으로 존재하는 화면이 다시 상대의 ‘부정’이 되는 양극성을 표상한다. 또한 두 다패널화는 둘의 관계를 통해 양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양면적 속성을 가지거나(<뱀의 기적>의 뱀과 용) 융합과 초월의 속성을 가지는(<만다라> 연작에 겹쳐져 등장하는 복수의 이미지) 이미지를 활용해 전시의 주제를 보다 심화한다. 다섯 폭으로 이어지는 <뱀의 기적>에서는 1828년 독일 자연사 서적의 삽화에 등장하는 뱀의 도상, 그리고 에도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화가 다와라야 소타쓰(Tawaraya Sōtatsu)의 수묵화와 한국의 민화에서 수집한 용의 도상이 겹쳐져 한 화면에 드러난다. 후면에 놓인 <만다라> 연작(‘천체’, ‘태양새’, ‘여신’, ‘나팔꽃’, ‘알파’)은 하나의 패널에 다섯 종류의 이미지가 겹쳐지는데, 각각은 칼 융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자연 속 만다라를 닮은 형상, 단청의 무늬, 현대의 후광 그래픽 등이다. 복도 공간에 놓인 <해>와 <달> 연작에서는 우로보로스의 이미지 위에 연금술의 핵심 주제이자 집단 무의식의 과정인 변형과 재생의 순환적 성격을 상징하는 해/달의 이미지,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에서 각각 추출한 종교적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 이준아의 작업은 비선형적 시간성 안에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순환하며 재생되는 이미지가 가지는 양극성과 이를 관통하는 초월적인 힘을 이미지의 원형에서 갈구한다. 이를 위해 그의 아버지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문, 잡지, 우표, 삽화, 광고, 광인의 그림과 같이 예술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미지를 불러오며, 본인의 방법론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편집증적인 이미지 수집을 통해 선험적 형상을 중심으로 한 사유를 전개했던 학자들을 소환한다. 또한 작가 이준아의 작품은 두 극이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하는 양극성의 속성을 닮아, 공유된 양극성을 재조명하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열증적 사고의 보편성을 증거하며, 부정의 부정을 거듭해 통합과 융합에 이르는 과정을 내포한다.
주석
1) 아비 바르부르크 저, 김남시 옮김. 뱀 의식: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원제: Bilder aus dem Gebiet der Pueblo-Indianer in Nord-Amerika). 읻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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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천둥이 치는 밤 뱀들은 깊은 물 밑에서 전율하며 춤추었다
이준아 (작가)
천둥이 치는 밤 뱀들은 깊은 물 밑에서 전율하며 춤추었다. 그들을 물살에 부서지는 번갯불을 조각조각 삼켰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둥그런 똬리를 틀고 축축한 하늘에 오르는 날을 기다렸다. 천 년은 살아남기에도 기다리기에도 무구한 시간이었다. 오로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 즉 용이 하늘에 나타난 밤만이 승천하고자 하는 뱀들의 간절한 소망에 불꽃을 일으켜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전두환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되어 고문을 겪고 후유증으로 반평생 정신질환을 앓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재작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갑작스레 작고하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투병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스무 살 무렵 나 역시도 비슷한 정신증을 앓게 되면서 우리는 모종의 치료 공동체를 형성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거의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면서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광증이 주관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까운 이의 광증이 주는 고통을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그제서야 약을 챙겨 드셨다. 아버지와 딸이 모두 정신질환을 앓는다는 것은 절망적인 사실이겠지만 ‘광기’란 적어도 아버지와 나에게는 아주 내밀하고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무엇이었다.
학부 초년생 시절에는 누구나 소위 ‘일기장 작업’을 한다고 한다. 나의 주제는 단연 아버지와 나의 정신병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서사에만 갇혀 맴도는 게 싫어서 개인적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제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선 게 ‘우연’에 관한 회화 작업이었다. 나의 의도나 선택을 가능한 배제하면서 재료가 가진 고유한 물성이나 작업 과정의 직관적 흐름을 따라가는 일은 나의 작가적인 태도에 개방성을 부여하면서 회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조종하지 않아도 그림은 나온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연이라는 주제 안에서 공백으로 비워두려 했던 ‘나’ 자신의 자리에 언제나 ‘나’의 정서와 서사가 자리한다는 모순을 늘 안고 있었다.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다는 작가의 의도라는 자가당착에 봉착해 그림이 갈 길을 잃어갈 즈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다시 나의 서사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헌정한 나의 두 번째 개인전 《나는 어두운 숲 속을 걷고 있지만 별들은 흔들리지 않지》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 우리가 서로 주고받았던 영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후 작업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주제를 나의 삶과 깊은 내면에서 추상적인 형태로 길어 올렸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인력으로 작용해온 ‘광기’였다. 나의 유년시절을 엉망진창으로 비틀어놓았던 아버지의 광기와, 스무 살 이후에는 정신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내 삶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흔들어대던 나의 광기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내가 경험과 사유를 통해 규정하는 광기란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전시는 ‘뱀’을 광기의 상징으로 삼으면서 시작한다. 뱀 중에서도 깊은 연못에 살며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꿈꾸는 이무기다. 불가능한 초월의 욕망을 품고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뱀이다. 그러나 나는 이 뱀이 때때로 미친 몸부림을 친다고 상상했다. 용이 되고 싶어서, 또는 이미 용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섬망에 빠진 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규정하는 광기다. 광증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스스로가 신이라고 믿게 되기 십상이고, 자신이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환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객관성이 무너지고 주관성이 온 정신을 지배하면서 전지 전능감애 빠져든다. 아버지는 그러한 광증을 자신의 초월의 철학과 연관시켰고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버지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패착이었다. 나에게 정신병은 길들여야 하는 성질 사나운 맹견과도 같은 것이었고 잘 가두어 놓아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과 맞물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인간됨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신처럼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곧 광기와 맞닿아 있고, 이는 인간 본성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서 뱀이 인간에게 속삭인 내용이기도 하다.
<만다라>에서 레이어가 겹쳐지듯 뱀 상징은 내게 관념적으로 겹쳐진다. 치유의 상징인 뱀, 지혜의 상징인 뱀, 그리고 칼 융이 인간 자아실현의 완성의 상징으로 삼았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 평생 정신병에 시달리며 자신의 왕성한 지적 욕구에 미치지 못한 결과물을 남겼던 아비 바르부르크의 저작 「뱀 의식」, 칼 세이건이 인간 지성의 상징으로 붙였던 제목인 『에덴의 용』까지.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광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런저런 도상들을 종횡무진하며 이미지를 겹쳐 올린다. 칼 융이 수집한 그림들, 중세 삽화들, 후광을 표현한 도형들,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자연의 무늬들, 단청까지. 거기에는 ‘원’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것은 우로보로스의 형상이기도 하다. 서로 무관한 것들을 확장된 사고로 연관 짓고 통일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인간 지성의 본질이고 그것은 우연한 사건들을 깔때기처럼 모아 자신의 광적 신념으로 융해시키는 광인의 사고와 다르지 않다.
<뱀의 기적>은 용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뱀을 표현하기 위해 용과 뱀을 다룬 동서양의 이미지를 한데 엮은 것이다. 구름 속의 용을 그린 중세 일본 수묵화와 우리나라 용 민화, 근대 독일의 뱀 삽화가 겹쳐져 나타난다. 레이어 밑에 깔린 용의 이미지는 해체되고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것은 고통스러운 듯, 분노한 듯, 환희에 찬 듯 춤을 추는 뱀의 형상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 스스로는 극도의 고양감을 느끼는 데 반해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 그는 고통스럽게 살아 날뛰는 한 개의 초라한 육체다. 나는 그러한 역설적인 느낌을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고, 때때로 허물을 벗듯 극한의 시간을 겪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던 아버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규정하는 ‘광기’의 파토스다.
<해>와 <달>은 <만다라>와 <뱀의 기적>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뱀이 꼬리를 물면서 뱀은 원형이 되고 이 원은 해와 달을 연상시키며 영원과 순환을 뜻하는 다른 원형의 상징들과 연결된다. 나는 이에 <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달>에는 관음보살의 이미지를 얹었다. 구체적인 대상은 상이하나 종교와 광기는 모두 영원불멸한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종교가 현실을 초월하듯 광기는 객관을 초월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가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는다면 종교는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기와 종교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구분선이다. 허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현실 초월의 욕구는 때로 광기라는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다라>는 광기의 로고스, <뱀의 기적>은 광기의 파토스, <해>와 <달>은 광기의 에토스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곧 <미친 뱀에게 경배를>, 즉 광기에 다다른 자를 경외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지성의 기저에 깔린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 숨 막히는 심연과도 같은 본질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는 살아남고자 사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 이준아 |
전시장 | 더 윌로 (The WilloW, ザ・ウィロウ) |
주소 | 02571 서울시 동대문구 고산자로 36길 38, 2층 |
오시는 길 |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1번 출구에서 도보 4분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에서 도보 7분 |
기간 | 2024.10.05(토) - 30(수) |
관람시간 | 11:00 - 18:30 |
휴일 |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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