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ttle full of Memories[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의 소설 『레베카』에서 주인공 ‘나’는 프랑스 시골의 휴양지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지금 이 순간을 (병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말한다. 순간을 유리병에 담아 영원히 간직하고 필요할 때 마다 꺼내 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회화작가의 태도와 어딘가 닮아있다. ‘나’의 추억들은 그것을 상기하는 단어나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이 글의 제목은 소설을 각색한 히치콕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뮤지컬의 노래 제목을 차용했다. 데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이상원 역, 현대문학, 60p. ]
고요한 방.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로부터, 어느 날 보았던 나무가 햇살을 부수는 광경과 콘크리트 바닥에 레이스처럼 드리운 그림자를 떠올린다. 기억은 시간과 흐르며 변하기도 하지만, 촉감, 청각, 온도 등과 같이 체화되는 감각들은 풍경을 품고서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피부 속에 머물던 감각들은 기억을 촉발하는 요소를 마주하는 순간 아득한 곳에 머물던 과거의 시공간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끈다. 장면이 장소의 형태를 단편적으로 정리하는 동안 풍경은 작가의 시공간적인 경험을 현재로 이끈다. 회화가 흐르는 시간을 한 폭에 담는 것이라면, 작가는 휘발하는 시간을 손에 쥐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무는 시기와 환경에 따라 다른 조직의 나이테를 그려낸다고 한다. 나무가 기억한 계절이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간들은 보이고 잡히지 않아도 내가 아는 모든 곳에 스며들어 풍경이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런 시간을 발견해 어여삐 여기는 일이 아닐까?
김지선의 이전 작업은 특정 장소나 장면에 대한 공감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왔다.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기하기 위해 작가는 특정 공간의 소리를 녹음하거나 영상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수집한 푸티지(footage)의 물리적인 장소성을 캔버스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기시키는 감각에 집중한다. 신작에서는 감각을 더 맑게 걸러내기 위해서 장면을 경험한 시간과 작업실에서 붓을 드는 순간 사이에 전보다 큰 폭의 시간차를 두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푸티지의 시각적인 개입에서 벗어나도 잔류하는 체화된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서, 밑그림으로 구도를 잡지 않고 떠오르는 감각을 기반으로 즉흥적인 이미지를 펼쳐나간다. 드로잉룸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우연으로 발생하는 형태를 통해 기억이 떠오르고 혼재되는 과정에 집중한 작업을 소개한다. 풍경을 회상할 때 떠오른 색을 시작으로, 평면에 물감을 흘리거나 섞는 과정에서 연상되는 기억들을 추적하며 그려낸 그림들이다. 작가에겐 나름의 룰이 있는데, 감각이 촉발하는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 작은 캔버스에 스케치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작은 캔버스에 기록하고, 이후 큰 화면으로 이미지를 연장한다. 작은 캔버스는 빠른 호흡과 적당한 균형의 필치로 밀도 있는 풍경을 드러내고, 큰 화면은 현장에 시공간적으로 개입하며 관객과 풍경이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풍경을 펼치기에 앞서 김지선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될 캔버스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교감하며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복기해 보고, 내면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정서를 화면 위에 풀어놓는다[ 작가노트].
김지선의 풍경이 드러내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서로를 품어나가는 과정이다. 그의 작업 속에서 시간은 입체적으로 흐르고, 이미지는 그려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과 맞물리며 탈각되거나 파생되면서 풀처럼 자라난다. 제목이나 러닝타임의 숫자가 무빙이미지의 서사를 압축하듯, 작가는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순간을 화면 위에 올린다. 그러나 기억의 단상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마주하는 촉매―그날의 날씨나 듣게 된 음악, 혹은 그려진 이미지가 소환하는 다른 기억들―가 발생시키는 새로운 시공간적 감각을 토대로 서사를 유기적으로 이어지게 한다. 지지체를 유지하되 서사를 프레임 밖으로 이끄는 것은 회화작가의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서사와 화면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작업 전개 속도에 맞는 물질과 조건을 찾아내는 것이다. 각인된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스치는 기억은 쉽사리 증발해 버린다. 다중적인 시간을 평면에 담기 위해서 김지선은 많은 실험을 거쳤다. 스틸컷처럼 화면을 분할해 이어지듯 병치해 보기도 하고, 느린 셔터 속도로 찍은 사진처럼 빛과 움직임의 궤적이 드러나는 화면을 연구하기도 한다. 혹은, 그림을 그려나가던 중 포착한 이미지의 일부를 다른 화면에 옮기고, 다시 이미지를 이어나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려왔다. ], 완성된 이미지의 일부가 다른 그림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미지는 서로 공명하며 시간과 시간 사이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과정의 일환을 엿볼 수 있는데, 연작 〈The flowery breeze that blew that night I, II〉(2024)는 이미지 속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피어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예전에 그린 작업의 부분을 콜라주하고, 추출된 부분으로부터 떠오른 심상을 이어나간 작업이다.
밀도와 무게가 다른 시점들을 잇기 위해 작가는 회화적 물성과 이미지의 레이어를 활용한다. 작가는 빠르게 휘발되는 테라핀유를 사용해 얇고 매끈한 화면을 쌓고, 오일파스텔이나 왁스 등의 밀도 있는 재료를 사용해 묵직한 형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얇게 드리워진 레이어는 층위를 드러내기보단 이미지들이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한다. 화면 속에서 다중적인 시간은 작가의 리드믹한 필치를 따라 추상적으로 드러났다가, 레이어를 통해 다시 차분하게 구체화되고, 물리적인 장면을 지우는 대신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에 도달하게 한다. 김지선의 회화는 풍성한 색의 팔레트와 색을 생동감 있는 형상으로 소환하는 매끄러운 필법을 선보여왔다. 그는 기억이 머금은 공기를 드러낼 수 있는 적합한 색을 연구한다. 가령, 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머물렀던 어느 초저녁을 재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무수히 많은 파랑 중에 가장 로맨틱한 푸른색을 찾아낼 것이다. 작가는 기억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색에 내포된 상투적인 의미를 희석하고, 심상 속의 공기를 캔버스 위에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날씨보다 더 붉고 따듯한 하늘의 색이나, 비 오는 날 날씨는 춥고 습했지만 포개진 두 사람의 손 사이에 머무는 작은 온기만으로도 포근해졌던 날의 빛깔처럼 말이다.
봄은 차가운 공기에 퍼지는 따스한 향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봄의 내음을 감지할 때 즈음 메마른 풍경 사이로 새싹의 서투른 몸짓이 보이기 시작하고, 따듯한 향기를 온전히 들이마실 때 즈음엔 알면서도 새삼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계절은 피부 속에 스며든다. 발바닥에서 바스러지던 낙엽으로,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손끝에 닿았던 다른 손끝의 작은 온기로,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튕기는 공의 소리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봄에만 맡을 수 있는 시작의 향기로. 그리고 체화된 기억은 계절과 함께 풍경으로서 돌아온다. 김지선의 회화가 추상의 과정을 따르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존재했음을 단서처럼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경이 아무 곳도 아닌 곳(nowhere)이 되는 것은 길을 잃기 위함이 아니다. 작업을 통해 경험으로서 드러난 풍경은 현실에서 멀어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지만, 아무 곳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든 될 수 있다. 김지선은 장소가 아닌 시간에 스며든 감정을 복기하여 아득한 거리에 있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다리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풍경을 그려낸다.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
고요한 방.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로부터, 어느 날 보았던 나무가 햇살을 부수는 광경과 콘크리트 바닥에 레이스처럼 드리운 그림자를 떠올린다. 기억은 시간과 흐르며 변하기도 하지만, 촉감, 청각, 온도 등과 같이 체화되는 감각들은 풍경을 품고서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피부 속에 머물던 감각들은 기억을 촉발하는 요소를 마주하는 순간 아득한 곳에 머물던 과거의 시공간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끈다. 장면이 장소의 형태를 단편적으로 정리하는 동안 풍경은 작가의 시공간적인 경험을 현재로 이끈다. 회화가 흐르는 시간을 한 폭에 담는 것이라면, 작가는 휘발하는 시간을 손에 쥐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무는 시기와 환경에 따라 다른 조직의 나이테를 그려낸다고 한다. 나무가 기억한 계절이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간들은 보이고 잡히지 않아도 내가 아는 모든 곳에 스며들어 풍경이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런 시간을 발견해 어여삐 여기는 일이 아닐까?
김지선의 이전 작업은 특정 장소나 장면에 대한 공감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왔다.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기하기 위해 작가는 특정 공간의 소리를 녹음하거나 영상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수집한 푸티지(footage)의 물리적인 장소성을 캔버스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기시키는 감각에 집중한다. 신작에서는 감각을 더 맑게 걸러내기 위해서 장면을 경험한 시간과 작업실에서 붓을 드는 순간 사이에 전보다 큰 폭의 시간차를 두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푸티지의 시각적인 개입에서 벗어나도 잔류하는 체화된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서, 밑그림으로 구도를 잡지 않고 떠오르는 감각을 기반으로 즉흥적인 이미지를 펼쳐나간다. 드로잉룸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우연으로 발생하는 형태를 통해 기억이 떠오르고 혼재되는 과정에 집중한 작업을 소개한다. 풍경을 회상할 때 떠오른 색을 시작으로, 평면에 물감을 흘리거나 섞는 과정에서 연상되는 기억들을 추적하며 그려낸 그림들이다. 작가에겐 나름의 룰이 있는데, 감각이 촉발하는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 작은 캔버스에 스케치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작은 캔버스에 기록하고, 이후 큰 화면으로 이미지를 연장한다. 작은 캔버스는 빠른 호흡과 적당한 균형의 필치로 밀도 있는 풍경을 드러내고, 큰 화면은 현장에 시공간적으로 개입하며 관객과 풍경이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풍경을 펼치기에 앞서 김지선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될 캔버스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교감하며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복기해 보고, 내면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정서를 화면 위에 풀어놓는다[ 작가노트].
김지선의 풍경이 드러내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서로를 품어나가는 과정이다. 그의 작업 속에서 시간은 입체적으로 흐르고, 이미지는 그려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과 맞물리며 탈각되거나 파생되면서 풀처럼 자라난다. 제목이나 러닝타임의 숫자가 무빙이미지의 서사를 압축하듯, 작가는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순간을 화면 위에 올린다. 그러나 기억의 단상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마주하는 촉매―그날의 날씨나 듣게 된 음악, 혹은 그려진 이미지가 소환하는 다른 기억들―가 발생시키는 새로운 시공간적 감각을 토대로 서사를 유기적으로 이어지게 한다. 지지체를 유지하되 서사를 프레임 밖으로 이끄는 것은 회화작가의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서사와 화면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작업 전개 속도에 맞는 물질과 조건을 찾아내는 것이다. 각인된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스치는 기억은 쉽사리 증발해 버린다. 다중적인 시간을 평면에 담기 위해서 김지선은 많은 실험을 거쳤다. 스틸컷처럼 화면을 분할해 이어지듯 병치해 보기도 하고, 느린 셔터 속도로 찍은 사진처럼 빛과 움직임의 궤적이 드러나는 화면을 연구하기도 한다. 혹은, 그림을 그려나가던 중 포착한 이미지의 일부를 다른 화면에 옮기고, 다시 이미지를 이어나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려왔다. ], 완성된 이미지의 일부가 다른 그림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미지는 서로 공명하며 시간과 시간 사이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과정의 일환을 엿볼 수 있는데, 연작 〈The flowery breeze that blew that night I, II〉(2024)는 이미지 속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피어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예전에 그린 작업의 부분을 콜라주하고, 추출된 부분으로부터 떠오른 심상을 이어나간 작업이다.
밀도와 무게가 다른 시점들을 잇기 위해 작가는 회화적 물성과 이미지의 레이어를 활용한다. 작가는 빠르게 휘발되는 테라핀유를 사용해 얇고 매끈한 화면을 쌓고, 오일파스텔이나 왁스 등의 밀도 있는 재료를 사용해 묵직한 형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얇게 드리워진 레이어는 층위를 드러내기보단 이미지들이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한다. 화면 속에서 다중적인 시간은 작가의 리드믹한 필치를 따라 추상적으로 드러났다가, 레이어를 통해 다시 차분하게 구체화되고, 물리적인 장면을 지우는 대신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에 도달하게 한다. 김지선의 회화는 풍성한 색의 팔레트와 색을 생동감 있는 형상으로 소환하는 매끄러운 필법을 선보여왔다. 그는 기억이 머금은 공기를 드러낼 수 있는 적합한 색을 연구한다. 가령, 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머물렀던 어느 초저녁을 재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무수히 많은 파랑 중에 가장 로맨틱한 푸른색을 찾아낼 것이다. 작가는 기억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색에 내포된 상투적인 의미를 희석하고, 심상 속의 공기를 캔버스 위에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날씨보다 더 붉고 따듯한 하늘의 색이나, 비 오는 날 날씨는 춥고 습했지만 포개진 두 사람의 손 사이에 머무는 작은 온기만으로도 포근해졌던 날의 빛깔처럼 말이다.
봄은 차가운 공기에 퍼지는 따스한 향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봄의 내음을 감지할 때 즈음 메마른 풍경 사이로 새싹의 서투른 몸짓이 보이기 시작하고, 따듯한 향기를 온전히 들이마실 때 즈음엔 알면서도 새삼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계절은 피부 속에 스며든다. 발바닥에서 바스러지던 낙엽으로,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손끝에 닿았던 다른 손끝의 작은 온기로,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튕기는 공의 소리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봄에만 맡을 수 있는 시작의 향기로. 그리고 체화된 기억은 계절과 함께 풍경으로서 돌아온다. 김지선의 회화가 추상의 과정을 따르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존재했음을 단서처럼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경이 아무 곳도 아닌 곳(nowhere)이 되는 것은 길을 잃기 위함이 아니다. 작업을 통해 경험으로서 드러난 풍경은 현실에서 멀어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지만, 아무 곳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든 될 수 있다. 김지선은 장소가 아닌 시간에 스며든 감정을 복기하여 아득한 거리에 있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다리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풍경을 그려낸다.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
작가 | 김지선 |
전시장 | 드로잉룸 (drawingRoom, ドローイングルーム) |
주소 | 03036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68-4, 2층 |
오시는 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9분 (통인시장 끝에서 왼쪽으로 도보 1분, 영화루 맞은편 골목) |
기간 | 2024.03.06(수) - 30(토) |
관람시간 | 11:00 - 18:00 |
휴일 | 일요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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